손까락 운동/인문학

소인배론 (by 강명관)

섬그늘 2009. 1. 6. 14:37

내친 김에 예전 강명관 교수가 쓴 '소인배론' 둘을 묶어 퍼옴. 2008년 3월, 5월의 글이며 '다산포럼' 일괄메일로 왔던 게시물임. (2009.01.06)

 

소인배 승승장구론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유자광전」을 읽었다. 유자광(1439-1512)은 1467년 이시애의 난에 자원하여 종군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벼슬길에 접어든다. 1468년 남이 장군이 모반한다고 고변하여 공신이 되었고, 1476년에는 권신 한명회를 모함하고, 1478년에는 강직하고 청렴한 신하인 현석규를 모함하였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는 1498년 무오사화를 일으켜 신진사림들을 일망타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업신여겼던 김종직에게 묵은 원한을 풀었다. 연산군이 쫓겨났으면 그 역시 쫓겨날 만도 한데, 중종반정에 참여 하여 다시 공신이 된다. 오직 개인적 출세와 권력을 쫓았던 유자광은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왜 소인배 유자광은 승승장구했던가. 따져 보면, 세상은 언제나 유자광의 편이다. 이에 「소인배 승승장구론」을 쓴다.
 

10년 20년 겪어 보면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람’이란 동물에 대해 알게 된다. 한 가지를 예를 들자면, 세상사람 모두가 부러워하는 출세코스와 권력은 주로 소인배들의 차지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그런 자리에 가는 경우는 사뭇 드물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인데, 나는 어리석게도 이 이치를 쉰을 넘기고야 겨우 깨달았다.
 

사람들 만나느라 공부할 시간은 없고


소인배들의 특징은 대개 이러하다. 이들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다. 마당발이다. 내가 대학에 있으니, 대학에서 목도한 경우를 들어본다. 이들은 교수이기는 하지만, 교수로서의 기본 임무인 연구와 교육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 대신 사람을 만나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 만나 술이라도 한 잔 하게 되면 상대방과 족보를 맞추어 본다. 사람살이 그렇지 않은가. 처음 보는 사이라 해도 성씨를 따지고 고향을 따지고, 살았던 곳을 따지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따지다 보면, 어느 곳에선가 반드시 겹치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지점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졸지에 선배와 후배가 된다. 형님, 아우님 하고 부르면서 십년지기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렇게 안면을 넓히고, 넓힌 안면은 늘 관리한다. 모임이란 모임은 다 참석하고, 상사나 혼사는 빠질 수 없다. 외국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서 저녁도 먹고 여비도 찔러준다. 남을 돕기를 좋아하여 남의 어려운 사연을 들으면 참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언젠가 그 사람이 자신에게 되갚아 줄 날을 기다린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모순에 대해 결코 불만을 토로하거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조직의 윗분의 터무니없는 행동과 불합리한 사안을 지적할 때면, 조용히 듣고만 있다. 분위기상 불가피하게 동조를 해야 한다면, ‘거 참 ……’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반대로 조직의 윗분이 무언가 잘 한 일이 있으면 은근히(하지만 열심히) 추켜세우는 말을 늘어놓는다. 이 말은 곧 윗분의 귀에 들어간다. 이뿐이랴. 높은 분이 나타나는 곳에는 늘 얼굴을 내민다.


높은 분이 더 높은 분이 될 것 같으면 그 분에게 확실히 줄을 댄다. 줄을 당겨보고 튼튼하다 싶으면 아랫사람들을 쥐어짠다. 순식간에 실적이 올라가고 윗분은 흡족해 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는 외부에(예컨대 신문과 방송)에 유능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다.


위로는 확실히 줄을 대고, 아랫사람들은 쥐어짜고


이런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면 그는 선거를 통해서든 승진을 통해서든 자기가 바라마지 않던 자리에 오르고 권력을 잡게 된다. 바라는 자리에 오기 전까지 남과 결코 각을 세우지 않던 소탈한 성격은 갑자기 독선과 아집이 된다.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을 발전시키자면 공부가 필요한 법이건만,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돌아다니느라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참다운 발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벌이는 사업 역시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점수를 따려고 하는 일이기에 조직이 망가지든지 남이 죽든지 살든지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이름이 난다. 그의 생애 역시 유자광처럼 승승장구다. 이런 식으로 소인배들은 언제나 출세하는 법이다.


어떤가. 주위에 그런 사람은 없는가. 아마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언제나 소인배가 다스려 왔기 때문이다. 공자와 맹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아마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2008.03.05)

 

 

소인배 등급론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내가 참여하는 작은 공부 모임을 마치고 단골집에서 평소 무간하게 지내는 K대학 P교수와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일전에 내가 쓴 「소인배 승승장구론」을 보았다면서, 어찌 소인배가 그것뿐이겠냐며 나를 나무랐다. 게다가 한문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허균의 「소인론」과 박지원의 「마장전」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 같다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약이 올라 “그럼 자네는 소인에 대해 별다른 설이라도 있는가?”라고 했더니, 그가 맥주잔을 들이킨 뒤 소인배에도 등급이 있다면서 자못 장황하게 「소인배 등급론」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나머지 아래와 같이 정리해 독자 여러분께 보여드린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사과는 다 같은 사과지만 꼭 같은 사과는 없는 법이다. 너와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또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동일한 이치로 소인배 역시 같은 소인배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종류와 등급이 있다.


향원형 소인배, 과시와 이익을 위해 약간의 비판적 언사도


소인배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여 쉽게 찾을 수 있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안다. 불의한 것을 보면 저것은 아닌데 하고 비판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울분이 치솟지만, 말을 꺼내거나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타고난 성품이 워낙 소심한 탓이다. 한 마디 내지르고 직장(혹은 그에 상응하는 것)을 때려치우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나이 드신 부모님, 아내(혹은 남편), 어린 자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래, 세상이 원래 다 그렇지 뭐, 내가 참자, 이렇게 스스로 위안하면서 입을 다물고 만다. 이 부류의 소인들은 대개 인정스럽고 눈물이 많다. TV를 보다가 불쌍한 사람이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지하철에서 동전 한 푼의 적선이라도 하는 사람은 대개 이 사람들이다. 이런 소인들은 조선시대에는 ‘백성’이라 불렀고, 요즘은 ‘서민’이라 부른다. 주위에서 어렵사리 찾을 수 있으니, 좀스럽기는 하지만 실로 다정한 우리의 이웃들이다. 이들을 굳이 분류하자면 ‘생계형 소인’이라고 할 것이다.


생계형 소인과는 달리 무언가 부당한 일을 보면 비판적인 언사를 내뱉는 분들도 계신다. 그런데 이 분들은 자신에게 무해한 경우에만 비판에 과감하고, 정작 과감해야 할 경우에는 발언을 삼가는 습성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비판적 언사 역시 비판하는 것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비판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비판했을 뿐이다. 그는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 바란다. “이봐, 아무개 양반, 내가 이번에 따져서 당신이 속한 부서가 불이익을 받지 않게 했어, 당신은 내게 고마워해야 해, 그러니 내게 술을 한 번 사야 해” 이런 식이다. 그는 옳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약간의 비판적인 말을 한 것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대학도 물론 있다. 공부와 연구의 중요성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진지하게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해 본 적이 없다. 겉으로는 늘 민주적 도덕적 언사를 늘어놓지만 속으로는 실상은 전혀 민주적 도덕적이지는 않다. 늘 생각하는 바는 자신의 안위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골프를 한 번 더 칠까, 외국에 한 번 더 나가서 놀아볼까 하는 생각뿐이다. 굳이 명칭을 달자면 ‘향원형(鄕愿型) 소인배’다.


창귀형 소인배, 권력을 추종해 착한 사람을 핍박하기도


향원형 소인배는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남을 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을 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인배도 있다. 이들은 특징은 언제나 섬길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다만 그 섬길 사람은 고매한 인격을 갖춘 도덕적 인물이 아니라, 더러운 것일지라도 큼지막한 권력을 쥔 사람이다. 헤맨 끝에 그 사람을 발견하면 신명을 바쳐 섬긴다. 이들은 많은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자신만의 생각은 없다. 섬기는 윗분의 의견이 곧 자신의 의견이 되고, 윗분이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 된다. 윗분이 내뱉은 한 마디에, 이들은 피를 바르고 살을 더한다. 윗분의 한 마디는 기가 막히게 똑똑한 법과 규칙으로 탄생한다. 그들은 민족과 나라, 또는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또 일의 합리성이나 조직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로 말하지만, 사실 목적은 딴 데 있다. 윗분에게 충성심을 과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윗분의 권력을 나눠 받고 즐겁게 그 권력을 누리고 행사한다. 그 결과는 오직 선량한 사람을 옭죄고 해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소인배는 ‘창귀형( 鬼型) 소인배’라 할 것이다.



P교수는 넋이 나간 채 듣고 있는 나에게 “자네는 더럽다고 소리치며 학교를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골프도 못치고, 외국에 나가 산 경험도 없고, 권력 있는 사람 곁에는 가본 적도 없고, TV를 보다가 마누라와 눈물이나 흘리는 것을 보아 오갈 데 없는 생계형 소인배일세.” “그럼 자네는?” 반문하는 나에게 그는 “나도 그렇지 뭐.” 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두 생계형 소인배는 대취하여 어깨를 겯고 비틀거리며 주점을 나섰다. (2008.05.07)

'손까락 운동 >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첨론, 아첨의 지극한 경지 (by 강명관)  (0) 2009.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