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일본군 위안부

“조선인 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윤명숙, 2015) 를 읽고 (작성 중)

섬그늘 2016. 1. 17. 11:54

이 책은 저자의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왜 생겼는가?
조선인 위안부를 양산한 구조는 무엇인가?

는 의문에 답하는 논리 구조를 택하고 있다. 저자의 논지를 요약하면

1. 성병, 강간 방지 따위 군 전력 보존과 이미지를 위해 일본군은 전장에 위안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2. 유독 왜 일본군만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 일본군이 처한 특수 사정이 있다.

3. 근데 위안부 징모를 국가가 나서서 하는 것은 당시 국제 법규에 반하는 짓이다.
4. 그걸 인지한 당시 일본의 내무성, 육군 본부, 경찰청이 일본 국내에서 일본인 위안부 징모를 어떤 식으로 할까 고심한 흔적이 있으며
5. 민간업자에 맡기고 징모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를 취했다.

6. 반면 식민지에서는 민간업자가 20세 연령 제한 마저도 지킬 필요가 없었다.
7. 빈농, 교육 수준이 낮은 여성에 대한 취업사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8. 수탈로 인한 빈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논리 전개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저자는 가능한 한 모든 자료와 접근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문제는 데이타의 숫자가 적다는 것. 입체적으로 조감하고자 하는 방법론에 비해 남아 있는 자료가 원체 없다.

책에서 주로 참고한 데이타는 피해자 43명의 증언 기록이다. 위안부 연구자들의 공통된 인식인즉 이렇듯 자료가 남아 있지 않는 분야의 연구에 증언의 가치는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다만 시점에 따라 다른 진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과제.

***

한편, 작금 한일의 인식 차를 염두에 두고 볼 때 내 눈을 끄는 부분은

9. 조선인 위안부의 징모는 취업사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43명 증언 중 ‘강제연행’은 5명)
10. 위안부 수를 특정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다는 부분과 배치됨. 출신 비율 자료 역시 없지 싶은데 앞으로 찾아볼 일.) (2015-12-15)


***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일본의 법적 책임을 따지며 한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 곧 만나게 되는 것이 '(물리적) 강제 연행'과 '조선인 위안부 20만 명 설'이다. 뒤져보면 둘 다 '실증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걸 주장하는 이가 많은 것은 왜일까? 나는 그걸 '지적 방기', '한방 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뭐...이 나마 정도 뒤져보기 전 나 역시 그 중 하나였음은 이제부터 생략하자.)


물리적으로 강제 연행하도록 국가가 제도화했다면 당시 국제법은 물론 국내법을 어긴 것이니 당연히 국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 1990년 이래 법적 책임 공방을 25년 간 하고 있는데 걍 게임 끝이 되는 거지. 마찬가지로 20만명 동원하려면 강제 동원하는 것 밖엔 방법이 없다는 추론에 힘 입어 거의 게임 끝이 된다는 거다.


그렇게 손쉬운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먄 "어차피 데이타가 없는" 영역의 속성을 활용한 우기기에 다름 아니다. 운동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화 또는 설득과 외교에는 보탬이 안된다.


여기에 일단 동의하면, 어떻게 일본의 법적 책임을 규명할 것인가? 조금 전 까지 푸근하게 기대던 "어차피 없는 데이타"를 다뤄야 하는 영역의 속성에 막막해진다. 저자는 그 바닥을 확인한 후 벽돌을 하나씩 불러 모아 다른 집을 짓는다. 더우기 '위안부' 증언 외에는 '실증주의'를 따른다. 작업의 규모, 결기의 세기가 가늠된다. (2016-02-01)


***


왜 '실증주의'를 따르고자 했을까, 아마도 1990년대 역사 연구를 둘러싸고 수정주의를 지지하는 층 까지 설득할 대상 또는 독자로 두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었지 싶다. 저자는 '위안부'의 증언을 제외하고 참고 문헌으로 신문, 공문서, 선행 연구 자료 등에 근거삼고 있다. 


저서 중 저자가 참고자료에 대해 언급한 주석이 꽤 있는데,

 184페이지, 2011년 국가기록원 소장 조선총독부 자료 3개월 조사 결과 - 일본 패전 이전 상당수 자료가 폐기되었음

 253페이지, 주요 논거로 삼은 '43인의 증언'의 출처, 의미 (문헌 증언)

 292페이지, 조선에서의 징모 실태를 밝힐 수 있는 문헌 자료는 현재로서는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방위청 따위 소장 자료가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는 발언 (링크)이 있었는데, 일본 정부 소장 자료가 공개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은 있다. "일본의 국가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라"는 언명은 "도둑질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라"와 논리 구조가 같아서 전쟁 당시의 모든 자료를 다 까발려야 한다. 그 경우 일본의 국익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기며, 일본 정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게다.


공개되지 않은 자료의 효용은 어느 정도일까, 수 만 명 추정의 조선인 '위안부' 중 43명의 증언 기록에 의지해 전체 모습을 조감해야 하는 현실에 비하면 엄청 도움되긴 하지 싶다. 근거 자료가 이 정도인지라 이 주제는 어떤 데이타도 대표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즉, 전칭 명제에 대한 반례로서 기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바, 이건 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읽으며 아쉽다고 느낀 점이기도 하다. (작성 중)(2016-02-02)


***


위에 적은 것이 내가 가늠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저자는 한정된 자료로써만으로도 '조선이 식민지이였던 탓에 조선인 위안부가 '양산'되었'음을 논증하고 '위안부' 문제의 일본 제국주의의 책임을 분명히 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 없거나 누락되었거나 모르는 부분은 그걸 적시해 둠으로써 이를 저자와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 두고 있다.


이 주요 플롯은 제2부의 머리말에서 볼 수 있다. 저서가 구축한 논리의 핵심이므로 길지만 인용한다.


"(전략) 조선의 징모에서 일본군이 전면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조선충독부는 징모 관련 총괄 책임자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 관한 자료는 일본의 패전 직후 소각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군사령부에 관한 자료는 미국 육군이 기록한 '심리전 심문 보고 제2호'가 남아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조선군사령부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요리옥 경영자'를 징모업자로 선정하고, 징모업자는 인신매매와 취업 사기로 조선 여성을 징모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군사령부는 "일본 육군의 모든 사령부 앞으로 보내는 서면"을 징모업자에게 전달하고, "수송, 식량 지급, 의료 등 징모업자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지원을 해주도록 각 사령부에게 요청"하였으며, '무료 도항권'도 "제공"했다.


이와 같이 식민지에서 이루어진 징모에는 징모업자들의 취업 사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식민지의 징모가 이 같은 양상을 보인 근본적인 원인은 점령지의 군정과는 다른,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형성된 사회 상황에 있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많은 조선 여성이 군위안부가 되었던 원인은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조선의 여성들이 징모되었던 배경에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 전시체제라는 시대 상황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여러 상황과 아울러 징모를 둘러싼 일본의 여러 사정도 조선 여성의 징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에서 일본인 군위안부를 징모할 때 국제법에 관련된 문제나 사회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부분에 대해 경찰의 단속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을 강구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일본인 군위안부의 징모는 크게 제한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제한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의 징모업자에게 최적의 징모지였다. (후략)" (255-256 페이지)


이 흐름을 내가 인식한 대로 풀어 쓰면

 a. 일본 국내 징모 때 법적 (국내, 국제) 위반 사례가 생겨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통첩이 돌았다.

(20세 미만은 대상으로 하지 마라 (당시 국제법), 영리 유괴 약취하지 마라, 황군의 위엄에 손상가잖냐)

 b. 그거 다 지키면서 어떻게 장사하나? 제한이 훨씬 없는 식민지가 최적의 징모지가 된다. 수탈로 인해 교육받지 못하고 (징모 당시 농촌출신 군위안부 60%가 보통학교에도 입학한 적 없었음 - 336페이지) 일자리가 아쉬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취업 사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즉, '물리적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강제동원이 없었나보다'라고 접지 않고 '물리적으로 끌고갈 필요도 없었다'는 논리를 세우고 근거를 찾은 작업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내게는 설득력이 있었다. 한편 이 문제의 속성 상 수만 명을 대표할 만한 데이타가 없고 증언 자료에 근거한다는 한계는 어디 가지 않는다.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딱 좋은 사안이라는 것이지. (여전히 작성 중. 201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