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감상문

공동경비구역 JSA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섬그늘 2008. 11. 13. 11:24

"내 나라 하늘은 맑기가 지랄이다."

최인훈님의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이 하는 말이다. 소피장의 아버지, 장연우씨의 옛 사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기록필름이 흐를 때 생각나던 문구...왜 하늘이 맑은데 지랄이었을까?

 

연초 박하사탕을 우연히 보고나서 집사람과 나는 웬간한 한국영화는 다 보게 되었다. 예전까지야 집에서 비디오로 보던 편이었지만, 주말이면 괜찮은 영화를 가족과 보는 것, 그리고 영화에 대해 느낀 점을 아이와 토론하는 것이 생활의 즐거움이다. 공동경비구역 간판을 개봉일에 집 근처 개봉관에서 보았으나 평소 예매를 않는 우리는 전회 매진이란 공지에 황당해했고, 결국 그 다음 주 예매를 해서 저녁에야 '공동경비구역JSA'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가 15세 관람등급으로 완화된 것은 바람직했다. 나는 내 기준으로 영화를 골라 아이와 같이 보는 편이며 등급제는 권장사항이지 강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왜 내 판단을 대신 해주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애초 18세 등급 판정이 이해가지 않고, 나아가 15세 등급도 불만이다. 적어도 중학생 정도라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꽤 되지 않을까 한다.)

 

30대 후반의 나는, 94년 조문파동을 끝으로 침묵하는 다수의 하나로, 분단 현실에는 머리 비우고 지냈었다. 그러다 98 10월 월간조선이 터뜨린 최장집교수의 논문 사건을 만났으며 조선일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북한 식량지원을 둘러 싼 옛 이야기를 파고들어가며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의 냉전적 사고, 레드컴플렉스가 어디에 기인하였는가를 나름대로 고민하며 이제 우리는 전체주의를 탈피하고 개인주의에 기반한 참여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그 영화를 보며 중반부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주된 이유이지 싶다. (딸 아이가 어리둥절한 눈치로 빤히 쳐다보아 감추느라 혼났다.)

 

영화를 본 다음 날, 마지막 총격씬의 이수혁병장 얼굴에 쏟아지던 총성과 음악이 어른거려 하루가 어찌 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여 답답했다. 그래서 언제든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회사의 이웃 부서가 단체관람하는데 표가 한 장 남는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두 번 관람을 하고 나서야 정리가 되었고, 그 감동에 JSA홈페이지(www.cyberjsa.com)에 들러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감상문을 모두 읽은 후 '섬그늘' 이란 아이디로 나름의 감상문을 그 게시판에, 그리고 우리모두(www.urimodu.com)의 게시판에 올렸다.

,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게시판 공지로 맥스무비가 감상문을 공모한다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이미 어디든 공개된 글은 제외한다고? 취지야 이해하지만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할 수 없이 뼈대는 그대로 두고 새로 다듬기로 했다.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온전히 남아있으매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고 운 좋게 입상까지 하면 금상첨화 아닌가? 이래서 그 게시판에 올렸던 첫 감상문의 제목과 이 글의 제목이 같아졌다. 글 머리가 너무 길었나? 이해해 주시라 ^^;

 

1. 들어가며...
이 영화는...주체의 해체를 가져오는 영화이다. 일상에 묻혀 쉬 잊기 쉬운, <남북은 같은 민족, 그런데 서로 증오하고 때려잡지 못해 안달해왔던> 현실을 숱한 가능성과 장치로써 제시하고 배치하여 새삼스레,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닫게한다. 그래서 잊고 있었든 애써 도외시해왔든 보는 이는 불편해지는 것이다. 예사로 웃고 넘길 수 없는 무엇이 가슴에 무겁게 남는 것이다
.

삽입된 웃음은 그 불편함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재미나게 낄낄거렸을수록 엔딩을 보는 가슴은 무거워진다. , 웃음은 긴장과 어우러져 저도 모르게 전편에 걸쳐 화면에 몰입하게 하는 미덕을 발휘하는데, "살려주세요", "소식이 왔을 때 참지않는 것이 참된 변비환자의 자세라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트면 안될까요?", "역시 미제라니까", "", (카악~), "기림자 넘어와서", "기걸 내가 만드네?" 등등의 촌철살인에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웃음들의 잔상이 마지막 총격씬에서 누워버린 이수혁병장의 얼굴위로 흐르는 총성과 <부치지 않은 편지>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에 겹치며 그 만큼의 세기로 더욱 가슴아프게 하는 것이다
.

그 느낌을 하나의 이미지로서 영화는 엔딩의 스틸사진 한 장으로 정리한다. 손으로 사진을 훑어가노라면 칼라사진은 흑백사진으로 바뀌고, 현재에 보는 이에게는 옛 이야기가 되새김되면서 영화가 주장하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새겨진다. 참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않을 수 없다. 말이나 글로 그 메세지를 그 정도 농도로 전달하려면 얼마나 많은 소통의 시간이 필요할까? 글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그래도 도리 없이 영상 언어가 내게 준 자극이 내 생각과 공명(共鳴)한 바를 정리한다. 누구나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본다
...

2.
우리가 아는 것은 제대로 된 것인가
?
답이야 "모른다"이다. 그래서 제대로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가 정답이며 이건 한참 옛날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더라. 그런데 자신이 보고들어 이해한 바는 당연히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신념은 데카르트가 설파한 의심을 불가하게 한다. 신념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체와 사회를 파멸로 몰고가기도 한다
.

영화 전편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신념을 초입에 표장군이 표출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빨갱이, 그리고 빨갱이를 때려잡으려는 빨갱이의 적. 중간은 없어.", "그래! 이수혁이. 이 놈 참 대단한 놈이야. 두 마리나 사살하다니." 당연히 표장군에게는 이 사건이 '뻔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냐"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보인다
.

영웅이란 대부분 그 존재를 갈구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요 상징이다. 소대장은 "이수혁이요? 그 놈 남잡니다." 선임하사는 "4시간 동안 지뢰를 해체하느라 늦었다더군요. 대단한 놈입니다"라 증언한다. 영화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오던 영웅신화를 하나하나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 관객은 곧 "X됐다"며 선임하사와 일행이 떠나 간 후 갈대밭의 아름다운 밤에 X돼버린 이수혁병장을 만나게 되며, <쨍그랑>이 실상은 어찌된 영문이었는지 이수혁병장의 다이나믹한 동작과 더불어 알게된다
.

이로써 이수혁병장은 억압된 조직구조 속의 영웅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잠시 관객들과 더불어 개인으로서 자유를 한 동안 누린다. 그러다가 끝내는 "씨발, 형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 우리는 결국 적인거야!"라 절규하며, 주입되었던 구조적 억압으로 회귀하는 개인을 보임으로써, 20세기의 90여 년 간을 군국전체주의로 이어진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념이 엮은 조직 속에서 개인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

소크라테스는 자기 비판으로써 잘못을 깨달으면 오류로부터 해방되어 진실에 접근한 희열을 느꼈다는데, 영화에서 진실에 하나씩 접근하는 소피장은 판문점이 "진실이 숨겨져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는 말을 '안락의자 인류학자'로부터 듣는다. 판문점으로 상징되는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정권이든 김일성정권이든 체제 유지를 위해 진실은, 그것에 이르기 위한 토론은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럼 다시 돌아간다. 소대장이나 선임하사나 진실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었을까? 아니 그리 알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었을까? 결국 소피장이 해촉되어 진실은 묻혀지고 평온해짐으로써, 진실이 평화의 적이라는 모순에 대한 해석이 보는 이의 몫으로 온전히 남는다.

 

 

3. 묶인 이 가슴

김지하님의 시, <>의 한 구절이다. 저 청한 하늘 푸른 산맥 너머 멀리 날아가는 새... 분단은 민족의 감옥이다. 그것이 극복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이념도 사상도 절름발이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라도, 대립하고 있는 저 쪽 체제를 이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일그러져 온 자화상을 우리는 갖고있다. 그 뿌리의 실체가 화면에서는 거창한 철책이 아닌 하나의 선으로 상징된다.

 

주체적으로 세상산다는 것이 이 땅에서 쉬운가? 개인을 억압하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권위주의는 우리 주변에 숱하다. 합리적으로 설득되어지고 사례가 쌓여 스스로 빛을 발하는 권위에 대비하여, 권위주의는 기득권의 의자에 걸터앉아 무조건적인 추종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억압이다. 상징화된 신성불가침의 비합리성을 깨닫는 것이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첫 걸음이 되며, 영화는 집단이 설정해온 상징을 몇 가지 장치로써 우스개로 만듦으로써 보는 이에게 문제로 형상화할 동기를 부여한다.

 

'외국 물'을 먹어서일까? 초소 안의 오경필중사는 '미제'에 거부감이 없다. 미제를 찬양하는 것은 북한에서는 금기시되어 있을진대, 개인으로서 그의 발언은 거침이 없다. 집단이 어떤 미사여구로써 그들을 독려하든, 그는 '전쟁 발발 후 3분 이내에 JSA 내 남북 인원이 전멸'하리라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인다. 그는 집단의 교시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눈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초소 안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 공간이 된다.

 

한 편 초소 밖에는 누군가가 신성불가침이라며 그어준 선이 놓여있고, 분단의 상징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수용한 바는 없다. 당장 어쩔 수 없을 따름이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니라고 영화는 주장한다. 가래침도 넘어가고 그림자, 모자, 반사된 햇살, 항차 올빼미나 강아지가 오고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권위란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넘는다면 사태로 발전하는데. 그 장벽의 높이는 개인의 한계를 넘는 터라 형 아우로 이미 어우러진 4명의 병사일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벽을 애써 잊고 닭싸움과 발씨름을 한다. 공기놀이, 손뼉씨름을 스스럼없이 한다. 문화의 뿌리도 같고 생김새, 쓰는 말도 같다. 초소 안은 노란 색조의 전등 빛 만큼 훈훈하고 푸근하다. 휴전선 병력 전진배치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된 밖과 대비하여 "정말 쳐내려오려고 했어요?", "기걸 내가 워떻게 아네?"하며 '팔아먹을래야 아는 게 없는'이들의 대화가 반합에 담긴 소주를 매개로 이어진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주체냐, 객체냐? 초소 문을 경계로 안과 밖이 왜 그리 달라질 수 밖에 없는가?

 

그렇게 현실을 지배하는 부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다. (하긴 그 이야기가 언제 이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된 적이 있었던가...) 이제 마지막일지 모르는 담배연기 자욱한 새벽, "안 가냐?", "가야지..." 영화는 남성식일병의 믿음과 애정을 그림도구로써 나타내고, 그 생일선물을 받은 정우진전사의 눈물(고저고저 우누만?)과 답례로써, 마지막의 한바탕 웃음으로 그 주체할 수 없는 답답함을 덮는다.

 


4.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방귀 내음 그윽한 초소 문이 열리고 최상위가 들어와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 오경필중사가 이수혁병장에게, 최상위에게, 동시에 총을 내리라며 말한다. "수혁아,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 때 화면에는 '왜 그리 일찍 죽었는지 모를' 고 김광석님의 '이등병의 편지'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며
.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이전 장면에서 초소를 비운 것을 최상위에게 발각당했을 때, '외국 물' 먹고 온 오경필중사는 최상위에게 무참하게 깨지는 반면 정우진전사는 가벼운 질책만 듣는다. "내가 책임지마, 총 내려라"라는 오중사의 말에 정우진전사는 불안하지만. 방아쇠 바깥에 손가락을, 한 가닥 믿음을 걸쳐둔다. 남성식일병은 이수혁병장을 끔찍히 따르지만 '통일의 물꼬'를 자신이 먼저 트는 것은 아무래도 역시 불안하다. 결국, 놀라운 속도로 동질성을 회복한 '젊은 날의 꿈'도 개개인의 삶을 지배해 온 분단이데올로기에 견주면 살얼음 수준일 따름이었다.


우리는, 한민족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분단의 반 세기, 오욕과 증오로 점철된 세월을 이어 오게 한 것은 최상위의 대사, "먼저 총을 내리면 생각해보지"였다. 그나마 이어오던 실낱 같은 신뢰는 녹음기가 역회전하며 내는 굉음과 동시에 최상위가 무전기를 뽑으며 간단히 깨어진다. 상황을 알고나면(나는 두 번 보고야 전말이 이해되었다) 어처구니 없을 이유로 긴장이 고조되며 파국으로 쉬 치달았던 것이다.

그 구조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95년 북한에 물 난리가 나서 쌀을 보낼 때 청진항에 입항한 씨아펙스호는, 베이징회담에서 국기를 둘 다 달지말자던 합의를 미리 듣지못한 상태로, 국제관례대로 마스트에 인공기, 배꼬리에 태극기를 달고 입항했고, 북한 당국자의 제지를 받는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북한의 도선사가 달려와서 사과를 했지만, 남한 언론들은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게양해야했다"라 연일 보도했고, 결국 그 때 15만톤을 끝으로 남한 정부는 쌀 지원을 끊었다
.

남북한에는 통치 집단의 교시에 충실한 최상위가 숱하게 있다. "왜 쟤는 안움직이는데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거야?", "쟤가 한 것 보다 더 하면 굴욕이야"라 생각하는 다수가 있다. 마중나온 김정일위원장과 악수하는 대통령을 TV중계로 보며 "쯧쯧, 저러려고 얼마나 돈을 갖다바쳤을까"라 혀를 차는 남녘 동포들이 있고 그런 인식이 지속되도록 미움과 증오를 상호주의란 이름으로 확대재생산해 온,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언론이 있다. 그래서 다수가 긴가민가하는 남성식일병이며, 불안하게 정을 주었다가 쉬 낙담하고 오해한 끝에 통제불능의 상태를 불러온 것 아닐까.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설정이, 이수혁병장이 오경필중사에게 두 번 빈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었고, 부들거리는 오경필중사의 볼, 그 이후 침착하게 수습을 하고 끝까지 이수혁병장을 보호하려던,  오경필중사의 행위였다. 사람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 있는가? 휴머니즘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존엄에 대한 믿음이다. 설령 믿었던 대상이 지금은 변심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그가 내게 의미있는 사람인 한 믿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도달하는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과 더불어 휴머니즘의 한계이지만, 네 본심이 아니었던 것을 나는 안다...며 믿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북한군 하사관이 했기에 이 영화의 메시지는 더욱 무겁고 강렬해진 것이라고 본다. 대질심문에서 상을 엎고 '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것도 같은 맥락.

(
, 대질심문에서 소피장이 오경필중사와 이수혁병장에게 양측의 진술서를 바꿔 준 것이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는 대목이라는 해석이 있던데, 내 해석은 다르다. 이미 '수경씨'의 사진, 초상화와 더불어 남성식일병의 투신을 경험한 소피장은 뭔가 있음을 아는 상태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뒤바꿔 진술서를 넘겨주었다고 본다. 둘 중 누구든 "이거 무슨 개소리야?"라며 도발한다면야 그 판단은 재점검의 대상이 되며, 적어도 그걸 읽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함으로써, 둘이 서로 알고지내던 사이라는 추리를 완성할 근거가 될 수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 민족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민족주의는 민족우월주의, 팽창주의로 이어지기 쉬운 위험성을 갖지만, 우리에게는 백범 김구 이후 분단으로 인해 일그러진 반쪽 민족주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극복한다는 세계화도 우리에게는 그 과정이 없었기에 헛구호일 수 밖에 없다.

영화 초입의 이수혁병장의 진술서 장면묘사, 개성병원의 병상에 누운 오경필중사의 진술서 묘사를 거쳐 투신한 남성식일병의 회상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 너머 초소는 점점 말살 대상으로부터 한민족임을 확인하는 장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지포라이터가 오가는 마지막 대화, 이수혁병장의 회상 속에서, 이수혁병장으로 상징되는 다수의 개체는, 자신의 행위 즉 동생으로 여겨 정을 주던 정우진전사를 스스로 쏘아 죽인 행위를 야기한 책임을 어디에도 묻지못한다. 분단 50년에 걸쳐 형성된 적대의식, 그에 기반한 체제는 총으로 쏘아 응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

그래서 개인은 함몰하고 이데올로기는 남는다. 여기서 다소 엉뚱한 질문, 최상위는 결국 죽어야만 했을까? 그는 오경필중사에게는 "조국은 우리를 믿고 전진한다"라 말하는 충실한 중간관리자일 따름 아닌가? 개성의 영안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녀(아마도 집안에 남자라곤 자기 밖에 없다던 정우진전사의 가족이지 싶다...)와 같은 딸을 가진 가장으로서, 그 또한 애틋한 사연을 가진 개인으로서 집단의 세포로 매몰된 것은 아닌가? (허긴 그런 것 다 따지고 배려하며 영화 만들 방도는 나도 찾지 못하겠다만
.)

지포라이터를 오경필중사가 다시 돌려준 것은...다시 시작하는데는 꽤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고추가루 낀 이빨을 보는데도 활용되고 초소 건너편에서 '햇볕'을 반사하여 무뚝뚝하게 굳은 남성식일병의 얼굴에 미소를 피우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 라이터는, 이수혁병장으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오경필중사를 추억하도록 하는 매개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일이초 차이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어요"로 매듭짓는 소피장의 이야기를 듣는 이수혁병장의 턱은 굳어있었고, 그는 라이터를 들고 갈 이유가 이미 없었다. 파국으로 치닫게한 결정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는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거나 착란상태에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실전에서 중요한 것은 빨리 뽑는 것이 아니라 침착하고 냉철한 상황판단'임을 알려준 그의 '', 오경필중사의 말을 전해듣고 확연히 깨달았던 것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인연을 끝내는 의미로도 해석하는 이도 있던데, 이거야 보는 이의 몫 아니겠나 싶다.)

치밀한 시나리오와, 그 의도를 올올이 실감나게 화면에 담은 제작진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주연 조연을 망라하여 골고루 극중 인물을 생생히 체현한 출연진에게 모처럼 가슴을 치는 버거움을 받은 고마움을 전한다. 가까운 시일 내 원작 <DMZ>을 읽으리라 숙제로 안고가는 즐거움도 생겼다. 아무쪼록 되도록 많은 이가 이 영화가 주는 미덕과 감동을 함께 느꼈으면 한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봤는데, 9살 난 내 맏딸은, 예전 글라디에이터나 시월애 따위를 재미있게 보고 스토리를 다 따라왔던 애가, 도통 JSA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여 황당했다. 왜 영화의 인물들이 그리 행위하며, 보는 사람들은 왜 웃고 우는지 알 수 없다고. 그래...네게는 무척 긴 이야기가 되겠지. 분단이 무엇인지, '이등병'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왜 진실이 묻혀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인지...

 

2000.09.21


2009.04.07 맥스무비에 제출한 원본을 용케 백업디스크에서 찾아 갈아 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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