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감상문

오아시스, 내가 만일

섬그늘 2008. 11. 13. 11:25
<오아시스> 내가 만일

영화는 뭔가 늦은 밤 라디오 프로그램이 흐르며 시작한다. 어떤 방인 듯 한데 벽에는 '이발소 그림'이 걸려있고 그림 위로 나무 그림자가 흔들린다.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장은 모르겠다. 소파에 널려있는 옷가지, 벽의 우중충한 그림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사물은 멎어 있고 시간만 걍 흐르고 있다는 걸 가늠할 뿐이다. 

객석에 앉은 나는 곧 버스에서 내리는 홍종두를 본다. 머리는 빡빡 시원한 반팔 셔츠에, 불안정하게 주위를 쉴 새 없이 흘깃거리며 손은 바지 호주머니에, 다리는 오른 발 끌며 일보 전진, 왼 발 오른발에 굽혀 붙이며 하염없이 건들거린다. 코 훌쩍거리며 버스 기다리는 행인에게서 담배를 얻고, 길을 묻는다. 

일상에서 나는 언제나 확률게임을 한다. 인상 더러운 젊은 남자는 대화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 이의 속내를 시간을 가지면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왜 확실하지도 않은 곳에 내가 시간을 쓴단 말인가? 그래서 초기 진입장벽에 외양, 그 이의 배경을 따진다. 기껏 해야 담배를 한 대 그냥 준다거나 두부와 우유를 함께 주는 정도 크게 손해 안 나는 범위 내에서 베풀고 위안 삼는다.

근데 "우유는 해태우윤데"라며 히죽 웃거나, 추위에 떨면서도 엄마 옷을 사는 모습은 양아치와는 거리가 멀다. 배달 시작도 미루고 가려 했던 곳은 피해자의 집이었다. 과일 바구니를 들고 출소 다음날 피해자 집을 찾아 간 것은 미안해서란다. "얌마, 니가 왜 미안해? 미안하면 내가 미안해야지."  알고 보니 현실의 더러운 나 보다는 '순수'한 종두를 보며, 내가 가졌던 선입견이 어찌 온전히 내 탓이랴...하며 애써 위로한다.

어영부영 별3개를 달고도 대책 안서는 홍종두는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본인이 세상의 문법에 맞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데다가 타인이 자기를 어찌 여기는지 관심이 없고, 세상 역시 이미 그에게 벽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꼬여있는 데에는 누구 잘못이 더 클까? 세상은 걍 말한다. "넌 항상 그런 식이야." 

거울로 비둘기, 나비를 만들어내는 한공주를 종두는 만난다. 마치 이사가던 날♬ 옆집 소년 소녀처럼. 두번 째 무단 침입하여 나름의 분위기를 잡으며 종두는 명함을 거울에 꽂아주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종두가 제 뺨을 때리고 공사장 표시판을 걷어차고 간 후, 공주는 낮거리를 하는 이웃집 부부와 장애인 아파트 호구조사를 위해 옮기고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그리고 올케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바로 가봐야겠다는 오빠를 본다. 어서 가라고 손짓하고는 문이 닫긴 후 천정을 바라보는 공주의 얼굴을 카메라가 몇 초간 비춘다. 

(이 영화에서 공주의 얼굴을 카메라가 꽤나 길게 잡는 씬이 두 번 나온다. 위의 장면과, 종두와 첫 외출을 한 아파트 옥상에서 눈부신 듯 하늘을 올려다 보는 장면이다.)

카센터에서 자다가 전화를 처음 받고 뜨악해 하던 종두가 불에 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 기억하시는가? 소외된 두 개체가 목말라 했던 소통은, 벼락과도 같이 찾아온다. 근데 왜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들이 서로에게서 감지한 아름다움이 안 보이는 것일까?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머리 속에서는 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외양이 그 아름다움을 가린다. 익숙하지 않다는 거이 죄악이란 말?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차별이란 게 현세에 창궐하는 것 아닐까?

너나 없이 확률게임을 하는 이유는, 그 나마 갖고 있는 기득권을 잃기 싫기 때문일 게다. 그런 확률게임마저 할 수 없는 환경에 몸을 담은 이라면 먼저 내미는 손이 가능해지고 맞잡아주는 손 역시 가능해진다. 세상이 거부해온 단점이 외려 서로의 장점을 찾게끔 이끌어주고, 그리하여 보는 이 의식하지 않고 둘만의 세계를 찾게끔 이끈다. 개중 축복할 일이다.

한편 퍼질러 앉아 그걸 보는, 그저 현실을 사는 인간의 한계로 치부하며 위험 회피에 열중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연민을, 인간에겐 진정이 보석처럼 묻혀 있다고 나발 불면서도 실제는 그리 못하는, 근거 없는 의심에 매일 시달리며 고단해 하는 또 다른 나에게는 위로를 보낼 일이다.

영화에서는 공주의 상상이 네 번 나온다. 전철 속에서 건너 편 연인들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여 플라스틱 병으로 종두의 머리를 갈기는 상상을 하며 키득거리는 현실의 공주, "장사 안 해요, 점심 시간이 지나서"를 겪고 카센터로 돌아온 장면에서 적극적으로 장난을 거는 공주("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청계 고가에서 파티를 열고 돌아온 공주의 방에서 벽 그림에서 오아시스가 기어나오는 상상, 그리고 막차가 끊어진 지하철에서 종두를 휠체어에 앉히고 노래를 불러주는 공주. 긔러분 정도가 갈수록 깊어져 상상에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노래 '내가 만일'은 세 번 나온다. 밤 늦게 공주의 방에서 종두가 빠른 템포로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를 부르기 전 느릿하게 박자 맞추며 둘이 합창,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들이대지만 침묵을 지키는 공주, 지하철에서 전곡을 부르는 공주의 상상. 사랑하는 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파 하지만 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한 부페에서 원 없이 종두의 식구들과 소통 불발을 거친 날, 언제나 허망한 노릇이기 마련인 가정법을 불러낸다. 내가 만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원 없이 줄 텐데... 

나는 영화 보는 내내 더러운 기분이었다. 비교적 환경이 종두나 공주보다 나은 나는 그리 하고 있다는 말인가? 경찰서 캐비닛에 머리를 부딪혀서야 발현되는, 소통을 향한 절절한 갈망, 그래 봐야 보는 이의 자기 확신을 더해주는 가슴 터지는 현실, 마법 처럼 나타나 나무를 베어 제끼는 종두에게 보내는 몸부림을 동반한 메아리...그리 온 몸을 던져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진정을 나는 애당초 포기한 것은 아닐까? 걍 현상만 보며 손 쉽게 "이 야밤에 어떤 싸가지 없는 넘이야?" 라 내지르며 말이다.

그런 최선의 노력은 현실을 살아가는 내가 기울일 수 있는 성격이 될 수 없다.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 불이익이 일상을 망가 먹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이다. 따라서 그 한계를 안고 가는 나는 언제든 소통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깨 쳐질 일은 아니다. 뭐 어때? 나만 그런 게 아닌걸 뭐. 그렇지만 자랑스러워 할, 목에 힘 줄 일도 아닌 것이다. 

편견, 선입견, 자기 확신에 묶여 사물을 재단하는 인간의 한계를 안고 매일을 산다. 따라서 일부만이라도 오류를 털어내고자 가능성을 나열하여 참조해가며 되도록 성실할 일인 게다. 자칫 근엄빳빳으로 인한 동맥경화 걱정에 때로 히히덕거리기도 하며. 

2002.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