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감상문

내 이름은 김삼순

섬그늘 2008. 11. 13. 11:26

가끔은 주목 받는 생이라...

나는 TV를 보지 않는 편이다. 누군가 의도했을 이미지에 나도 모르게 지배 당하기 싫어서일 게다.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적을 것이라 여겨서다. 그런데 드물게 기회가 닿아 '내 이름은 김삼순'을  매우 재미있게 보았고, 인터넷 뉴스로 올라온 관련 비평을 샅샅이 찾아 쟁겨 훓은 다음,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

이렇듯 감상문을 써야겠다며 마음의 빚으로 갖고 가게끔 만드는 울림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이미 있었지만,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사회적 함의를 나름대로 정리한다.

***

내가 받은 감동은 16부에 집약되어 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 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버스 정류장에서)

왜냐면,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잘 알 걸랑요. (희진에게, 좋은 의사가 될 것이라며)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어쩌면 우리도 헤어질 수 있겠구나. 연애란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미리 두려워하지 않겠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잌을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더 사랑하는 것. (남산 계단을 오르며 마지막 대사)

***

드라마의 '김삼순'은 여러 모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현실의 나와 같은 모습이로되, 내가 되고 싶지만 될 리 없기에 애제 체념한 이상형을 매우 손쉽게 이룬다. 그래서 본질은 하릴없는 판타지이다. 근데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말 되게끔 엮어낸다. 리얼리티가 드라마에 녹아 살아 있다.

우선 그의 외양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30대 미혼으로 몸무게가 쪼까 많이 나가는,  전문직으로 자립의 꿈을 키우는 여성이다. 고졸에 이름이 촌스럽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갖지 못한 실패의 경험도 갖고 있다. 이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분류되는 특성을 왕창 갖고 있는, 소외된 타자의 집합체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쉬 몰입하게끔 하는 장치를 이 드라마는 골고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동일시의 힘이다.

드라마는 16화에서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를 다룬다. 내게 울림을 준 구절은 '춤 추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보지 않는 것처럼'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외양, 행동을 어떻게 볼까? 하는 타인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면 주체를 세운 인간이다. 비록 조금만이라도 자유로와졌다면 그 주체는 원형을 가진다. 원형이 한번 생긴 이후에는 진정을 다하여 세상과 소통함으로써 그 원형을 틈실히 키워나갈 수 있다. 뭐, 이거야 원론적으로 '칼로리 낭비', 지당하신 공자 말씀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어떤가? 이 땅에서 고졸은, 여성은, 대졸과 남성에 비해 열등한 인간이다. 권력이 다루는 대상, 수단일지언정 인간대접을 받기 힘들다.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에 노출된 대중은 바비인형의 외모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정형화된 눈코입, 얼굴 형태를 가져야 미인이다.

그래서 삼순이 처럼 고졸에 뚱뚱하며 결혼적령기 지난 이름 촌스러운 여성은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세상과 소통하기 어렵다. 매도 맞아본 넘이 안다고, 몇 번 겪으며 사회의 백안시 속에 자신의 위치를 체득하며 주눅 든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근데 춤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건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한국사회는 개체가 주체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아득한 인식의 정글이다. 외양과 조건을 보아하니 이러이러한 사람이구만, 틀림 없어, 하며 때려잡기 바쁜 인식 탓에, 개체는 소통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소통의 문턱을 채 넘지 못하기에 어딘가 묻혀 있을 보석인, 그 이의 진정, 내면의 아름다움은 빛을 보지 못한다. 확장되어 마땅한 주체는 외려 오그라든다. 절망을 체화한다.

이 과정을 거듭하며 소수자는 사회부적응자가 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그것 봐, 내가 잘 본 거야, 쟤 봐라, 별 수 없잖아? 하며 원래 때려잡았던 인식이 정당화된다. 걍 악순환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에 창궐하는 오만 차별, 여성, 외모, 호남, 동성애, 장애인, 학력 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기에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 문제로 형상화하기 정말 어렵다. 뭐, 나만 그런 거 아니잖나? 하며.

그걸 문제라고 여겨지게 했기에, 적어도 문제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기에, 절묘한 장치로써 많은 사람이 보게끔 한 것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이다.

외모와 조건이 거진 형편무인지경으로 설정된 삼순이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기회를 잡았을까? 어떻게 소통의 문턱을 넘어 자기애에 기반한 따뜻한 소통을 이루고 세상을 구원하며 '더 나를 사랑해야겠다'며 주체의 원형을 키울 수 있었을까? 이제 드라마로 들어가 따져 보자.

삼식이(^^)는 2부에서 삼순이의 맞선을 신파로 엉망으로 만든 후,  엉금엉금  남산 계단을 오른다. 같은 계단을 마지막 16부에서는 같은 계단을 이번에는 좌우로 따로 오르다가 가운데 난간을 넘어 뽀뽀하는 씬으로 드라마를 마무리하며 삼순이의 혼잣말이 흐른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어쩌면 우리도 헤어질 수 있겠구나. 연애란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미리 두려워하진 않겠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잌을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더 사랑하는 것.'

거참...이렇게 철든 젊음이 있나? 나를 사랑하는 것, '자기애'는 모든 사랑의 뿌리이다. 내 외모와 조건이 아니라 내가 형성시켜온 사고방식, 세상과 타인을 보는 눈에 자신감을 갖고 사랑하는 것을 자기애라고 나는 부른다. 외양이 아니라 내면에 무게를 실을수록, 자기애는 세상으로 퍼져나가 박애에 닿는다. 삼순이의 자기애는 1부에서 싹을 틔운다. 처절히 실연을 맛본 후 깨달음을 얻는다.

(삼순이의 상상, 호텔에서 자연낙하, 바닥에 엎어져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데?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장례 치르면 먹고 살기 바쁘고, 제 자식 낳아준 마누라도 돌아서면 남남인데. 네가 뭐라고 너를 평생 기억해?'

(호텔 남자 화장실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였던 시절, 구름 위를 걷는 것 처럼 아득하고 목 울대가 항상 울렁거렸다. 그 느낌이 좋았다. 거기까지 사랑이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내게 그런 행복을 주고, 또 앗아갔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 그를 잃어서가 아니다. 사랑, 그렇게 뜨겁던 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믿어지지 않아서 운다.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 운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랑이 가여워서 운다.'

철학자 삼순은 드라마의 4부, 지하철에서 진헌에게 말한다. "결국은 다 자기 식 대로 보게 되어 있어요." 또 13부 찜질방에서 채리에게 말한다. "설흔 넘으니까 쬐끔 보이더라. 아니다, 보이긴 뭐가 보이냐, 결국은 다 자기 자신에게 속는 거야." 이렇듯 사람의 인식이 나약하다는 것,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한 이에게는 세상이 달리 보인다. 그렇게 세상이 달리 보이는 만큼 그것과 교통하는 자세도 달라진다.

사무치도록 아파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부터 울림을 쉽게 받는다. 그리 아파보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연민을 느낀다. 보다 더 사람을 따뜻하게 볼 수 있으며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오묘함이요, 축복할 일이다.

돈이 아쉬운 삼순, 파띠쉐가 아쉬운 진헌은 피고용자와 사장, 계약연애를 하는 사이로 묶여 하염없이 부대낀다. 당분간은 싫어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서로를  무지 재수 없어하며 악악거리면서도 붙어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사이로 설정된다. 여유 있는 시간과 서로가 함께 하는 공간에 힘입어 저 마다 갖고 있지만 묻어둔 아픔이 드러난다. 울림을 받는다. 서로를 알아가며 소통이 흐른다. 이 자연스러움.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 줄타기를 가능하게 한 바, 이 드라마의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다.

이 설정의 가장 큰 수혜자는 진헌이다. '얼음왕자' 진헌이 삼식이가 되어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애초 받은 상처 때문이었을까? 초입에 나타난 진헌의 주체, 자기애의 원형은 건강한 편이다.

(1부, 호텔 커피숍에서)
여자가 눈치가 좀 없네요. 휴대전화를 꺼 놨다면 이미 끝난 거잖아요? (이후 휴대전화 안받는 장면이 줄기차게 나온다. 그래서 진헌, 희진, 삼순이 모두 지레짐작에 속을 썩는다.)

(1부, 남자 화장실에서)
이런 날 남자가 다른 여자랑 호텔에 왔으면 게임 끝난 겁니다. 다음부턴 왜 그랬느냐고 묻고 따질 것도 없이 정강이 한 번 걷어차고 끝내세요.. 세상에 널린 게 남자고, 남자, 다 거기서 거기예요.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2부, 요부와 어리석은 왕이 말아먹은 나라에 대한 연설 후 사무실에서)
난, 개인적인 경험을 공적인 일에 투사시켜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을 제일 혐오합니다.  

(3부, 유통기한 지나 짓물러터진 호빵 같다는 말에)
어머니가 들이 댄 아가씨들 보단 훨씬 훌륭한 여자예요. 자기 손으로 성실하게 일해서 그 돈으로 꿈을 꾸는 여자예요. 부모님들이 사준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그런 바보들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구요. 그리고 주제파악을 잘 해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건강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아주 명쾌한 여자예요.

(4부, 1호선 지하철 연결 통로에서)
난 그 사람 보다 그 쪽이 더 이해가 안돼요. 얼마나 우습고 가벼운 건지 그렇게 겪고도 너무나 쉽게 사랑에 대한 기대를 또 하잖아요.

(13부, 레스토랑에 찾아온 어머니와 대화)
그럼 전엔 왜 데리고 오셨어요?
희진이 뗄려구.
왜 그렇게 사세요? 안 힘들어요?

이렇듯 어른스러운 반면, 타인의 아픈 부분이나 소외된 자의 몸부림, 갈망에는 채 둔감하다. 아직 철이 덜 든 것이다.

(1부, 독특한 경로로 케잌 맛을 본 후 삼순이를 따라잡은 택시 안에서)
아줌마든 아가씨든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1부, 인생은 초콜릿상자와 같다며 면접을 끝낸 후)
왜 그래야 되죠?
왜라뇨?
왜 김삼순을 김희진이라고 불러야 되느냐구요.
아니, 그럼 사장님을 삼식아! 제가 이렇게 부르면 좋겠어요?
내 이름이 현진헌이 아니라 현삼식이면 당연하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 삼식이가 아닙니다.
그걸 누가 몰라요?
그럼 왜 그러죠?
지금 절 놀리는거죠?
제가 왜요?  

(2부, 호텔에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채 신파를 한 후)
상황종료됐는데 이제 정신 좀 차리죠 김삼순, 아니 김희진씨.
배 안 고파요? 어디 가서 밥이나 먹죠.

(3부, '연애계약서'를 쓰기 직전)
그 몸에 그렇게 비싼 장기가 있을까? 아! 애는 잘 낳겠네.

군데군데 덜 익은 진헌, 인식의 본질에 가까이 가 버린 삼순, 이렇게 어느 정도 자아를 형성한 두 개체가 대화한다. 조금 더 일찍 깨달은 삼순이가 조금 더 시작이 늦을 뿐인 진헌의 깨달음을 돕는, 소통을 이뤄가며 묻혀 있던 아픔을 치유해 가는 과정, 얼음왕자가 녹아 내리는 전개가 지루하지 않게 이어진다.

(2부, 포장마차에서 합석한 직후)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지, 이 세상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이끌어갈 지 모르지만, 나 같은 개미들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아 이거지, 근데 오늘 네가 나를 짓밟았어. 그것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말이지.

(4부, 레스토랑에서 동일시의 힘이 상처를 위로하는 장면)
오늘은 실연한 여자들을 위한 이벤트가 있는 첫날입니다.  
왜 하필 피아노예요?
그럼 춤 출래요? 꼭 드라마 따라하는 것 같잖아요. 개나 소나 피아노야.
저기요, 저 Over the Rainbow 부탁해도 될까요?  

(5부,  삼순이 미주, 삼식이와 과자를 만들면서)
미주 근데 머리가 꼬불꼬불한 게 꼭 모모 같애. 너 모모가 누군지 알아?
키도 아마 너만 할 걸? 모모는, 집도 없고 할머니도 없고 삼촌도 없는 그런 불쌍한 아이야. 근데 마을 사람들은 모모를 다 사랑한다? 왜냐면, 모모는 귀 귀울여서 들어줄 줄 알거든. 모모는 말을 안해.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듣는 걸 아주 좋아해. 마을사람들한테 고민거리가 있으면 다 들어주는 거야, 귀 기울여서. 응? 그게 중요한 거야, 귀 기울이는 거. 그럼 마을사람들은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다 풀린 것 처럼 기분 좋게 돌아 가. 이 아줌마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근데, 내 말만 하는 어른이 돼버렸어, 지금처럼.
가끔 모모 같애요.
정말이요?
모모는 분명 악동이었을 거예요.
뭐라고요? 이 씨!  
으하하~ (알고 보니 진헌은 웃을 자격이 없다-11부)  

(4부, 지하철에서)
3년이나 연애하고 몰라요?
그럼 사장님은 잘 알겠던가요?
왜요, 또 네번 째 조항 어긴 거예요?
결국은, 다 자기 식 대로 보게 돼있어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갖다 붙이고. 그래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죽었다 깨도 모르는 거죠.  

(4부, 1호선 지하철 연결 통로에서)
난 그 사람 보다 그 쪽이 더 이해가 안돼요.
내가 왜요?
얼마나 우습고 가벼운 건지 그렇게 겪고도 너무나 쉽게 사랑에 대한 기대를 또 하잖아요.
누가 뭘 쉽게 하는데요? 난, 단 한번도 사랑을 쉽게 해 본  적 없어요. 시작할 때도 충분히 고민하고 시작하고, 끝날 때도 마찬가지예요. 호르몬이 넘치건 메마르건,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구요. 진심으로요.

(6부, 삼순이 현우와 채리의 약혼식을 지켜보며)
사랑의 열량, 그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간 걸까?

괜찮아요?
김삼순씨.
예.
괜찮냐구요.
뭐가요?
케잌, 훌륭하네요.

(6부, 피아노를 함께 치고 나서)
아까 왜 울었어요?
민현우씨, 아직도 좋아해요?
아뇨.
근데 왜 울어요?
대답 꼭 해야 돼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기가 막혀서요. 사람이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내가 생각했던 영원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없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기가 막혀서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쳇, 잘난 척 하기는.

(11부, 삼순이의 노트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서로의 영혼을 나누는 것!

(13부, 한라산에서 내려와서)
너 참 대단해. 지금도 그런데 그 다리로 옛날엔 어떻게 올라갔냐?
적어도 죽진 않았으니까. 힘든 일이 생기면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 적어도 죽진 않는다고.

(15부)
그럼 내가 갈 게요. 내가 갈게. 그럼 잘 보살펴 줘, 응?
정말 일 주일이면 돼? 갔다 와.

(16부, 희진과 마지막 통화에서)
왜냐면,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잘 알걸랑요.

트라우마('지식검색창' 왈,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外傷後-障碍,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갖고 있을 뿐, '인간미라곤 눈꼽만도 없는', '제대로 미지왕'으로 행동하던 진헌은, 이렇듯 삼순이와 함께 하는 시간으로 인해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인' 이성의 매력에 눈을 뜨며 자신의 선입견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간다. 스스로 자신의 눈에 든 들보를 치우고, 타인에게 묻혀져 있는 보석을  찾아내는, 참으로 귀한 체험이다. 덩달아 세상을 보는 눈이 교정되며 철이 든다. 구원을 받는다.

그 시작점은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울림, 남의 일 같지 않은 동일시인데, 회를 거듭할수록 그 동일시의 힘이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드라마를 보는 이의 얼음도 함께 녹아 내린다. 보는 이는 어느 새 삼순이가 되어 때로 동일시하고 때로 연민을 느낀다. 야멸차게 희진을 내친 후 나사장이 아들 내외의 사진을 껴안고 우는 장면은 그래서 울림을 준다. 이러한 울림을 주된 매개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이 드라마에는 작위적인 음모, 미움과 증오가 없어도 장사가 된다. 시간을 두고 그 이가 소통을 시작하도록 돕는 연민과 화해가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세상과 사람을 따뜻하게 보고 울림을 줌으로써 모든 이(진헌, 메기여사, 희진, 헨리, 영자)와 친구가 되는 삼순이와는 극단적인 대척점에 채리가 있다. 자기애의 뿌리를 '은행장 집 둘째 딸'이라 두고 타자를 '방앗간집 셋째 딸'로 두어 자기 위안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채리는 외모와 조건에서 출발한 소아적 에고이즘에 매몰되어 있다. 대개 이런 자기애는 세계로 뻗어 박애에 이를 수 없고, 세상과 소통은 더더욱 지난하다.

8부에서 이영이 이야기하듯,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만의 성이 있다고. 우리가 그 성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듯이, 그 사람들도 성 밖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고. 어쩌면 그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지."

이런 탓에, 실연(혹은 실패)의 아픔을 매개로 찜질방에서 삼순이와 채리가 이룬 화해는 내게 무척 미진하고 아쉬운 부분이다. 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 성을 둘러싼 벽이 조금쯤은 균열을 일으켜 서로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 드라마에서 삼순이와 부대끼면서도 구원 받지 못하는 캐릭터는 현우와 채리인데, 그렇다고 안타깝거나 아쉽지 않은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가장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TV드라마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걸 정면으로 다루면 재미가 없어질 테니까.

이어지는 이영의 대사,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원칙이 있어. 그 원칙대로 선택해가며 사는 거구.  남의 원칙이 자기 원칙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는 건 유아적인 발상이야."
"나는 차이를 말하는 거야"

민주주의 사회에 산다면 모두 생기초로 알고 있을 언명이다. 근데 이건 뭔가?
삼순이의 조수인 인애는 여수 출신으로, 자기 입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나오면 기겁한다. 서울말을 빨리 배워야 한댄다. 왜 문제가 될까? 근데 이 드라마는 맛만 보여줄 뿐, 이것 역시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뭐, 이 또한 '현실적'이거니.

짖궂은 질문이 이어진다. 삼순이를 채용할 것이냐? 설문에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의 60% 정도가 부정적이었댄다. 이유는 눈치가 없어서, 조직 분위기를 저해할 것이기에. 과연 그럴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삼순이표 매력이 업적으로 연결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글치만 면접은 짧은 시간에 싹수를 보는 작업이다. 자본주의에 정보화 사회인지라 쏟아지는 정보를 돈에 연결시키려면 짧은 시간에 판단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가 합리화된다. 여성 월간지 반이 살을 빼라는 광고이다.

마찬가지. 학력으로 인격과 잠재성을 평가하는 사회인지라 내 아이만은 남 보다(!) 학력이 좋아야 한다. 굶더라도 과외를 시킨다. 뭐, 어때? 나만 그런 게 아닌걸 뭐. 외모지상주의와 학벌주의는 천박한 사회상을 반영한다. 썩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부분 여기지만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부터 바뀌기는 싫다.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처신이 된다.

뿌리부터 뒤틀려 있는 한국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벽은 너무도 강고하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개인의 각성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본 이 누구도 '아, 뚱뚱해도 희망이 있구나', '이제부터는 이름이 촌스러워도 상관없겠구나'라 생각하지 않을 게다. 글치만 대다수 인식에 티끌만한 영향은 주었을 게다. 웃음과 재미에 더해 문제를 문제로 여기게끔 보너스를 준 것이다. 딱 그 가능성 만큼만이라도 사회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나는 여긴다. 설령 그것이 깨어보니 허망한 '뽕'이라 할지라도.

웅...허망한 뽕이란? '김희진'과 '김삼순'이란 이름이 주는 이미지 차이에서 시작해 보자.

(12부, 사연 많은 남자화장실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이름 바꾼다고 사람도 달라지니?
내 말이 그 말이야, 근데 왜 바꿔?

(15부, 종로구청에서 개명허가서를 찢은 후)
사랑이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인생의 숙원 과제이던 이름 바꾸기를 포기한 것은, 삼순이가 더 좋다는 진헌의 뜻을 따라서일 게다. 그건 이미 삼식이로 체화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함께 겪은지라 시청자는 삼순이에게 호감을 더 느낀다. 1부에서 김삼순을 김희진으로 해달라고 했을 때 진헌이 멀뚱거린 바, 이름은 기호에 불과하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채, 자신이 고른 것이 아닌, 태어나며 부여된 특질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곤난하다. 근데 이 생기초가 이 땅에서는 썩 보편적이지 않다는 데 비극이 있다.

한국 땅에는 성차별, 장애인차별, 지역차별, 혼혈 차별이 횡행한다. 이름 참 거시기하네, 이름 외우기 쉽네요라는 말이 듣는 이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도처에 이미지가 판친다. 그리 널리 퍼져버린 이미지에 기대어 별 생각 없이 상처를 준다. 그래서, 주입된 이미지를 갈아엎고 홀로 서는 것이 주체적으로 세상 사는 첫걸음이다. 그러기 쉽지 않은 사회에 사는 고단함이 있고, 그 쓸쓸함을 가끔씩 이런 드라마를 보며 달래는 비극이 있다. 그러니 뽕이라는 거다.

드라마가 구현했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안다. 속박과 굴레 속에, 어떤 유형이든 억압 아래 하루를 살지만 주체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원하는 이들에게, 주입된 이미지나 억압을 우스개로 보여주며 위안했다는 점, 그래도 사회가 조금씩은 진화한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설령 본질이 뽕이라 할지라도 이 드라마는 미덕이 있다.

어떤 남자애가 핵교에서 내 딸 아이에게 삼순이라고 불렀댄다. 그닥 나쁜 뜻으로 부른 것은 아닌 듯 한데 딸아이는 그 후 줄곧 몸매, 몸무게에 번민했다. 그럼 드라마를 다 보고 난 지금 딸아이의 고민은 줄었을까? 모를 일이다. 나야 외양 보다는 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더 중요하다고 거품 물지만, 아이는 최악의 경우 지방흡입을 고려한다. 내 지향과는 어그러져 있는, 엇박자를 놓는 이노무 현실 때문에 이 드라마에 열광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냐, 그래도 마냥 뽕 만은 아닐 거야...되뇌이며.

***

워낙 탄탄한 구성을 갖는 원작에, 연출에, 캐릭터를 녹여낸 연기. 주옥 같은 장면이 늘비할 터이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1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면접 장면)
'심플'하게 준비한 케익을 시식하는 면접관들의 분위기, 반응에 부심하는 삼순이의 표정 변화

(2부, 포장마차에서 돈 찾으러 가는 대로에서)
집이 부암동이었죠?
내 돈 찾아올게 지둘려, 삼식아~
(끼익!!!)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응? 야 이 짜식아, 죽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어?
쉬워! 쉬우니까 조심해!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니란 말야!
응, 그래쪄? 이 누님이 그렇게 걱정돼쪄? 이 쨔식이 엇다대고 소리를 빡빡 지르고 그러니? 야 오버하지마 짜식아.

(3부, 돈 필요한 얼굴이잖아요 전후)
"유료관객 ...명?"
"그 때 그 제안 지금도 유효해요?" 부터
"여러분, 우리 연애 중입니다. 두 달 됐습니다.", "미쳤어요?"를 거쳐
"이걸로 합시다. 숙자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예요." 까지.

(4부, 케잌점 견학 갔다가
느닷없이 삼순이 화장실 가자
현우가 ‘그놈’임을 깨달은 후 진헌의 표정 연기

(7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직후 공항에서)
"아까 형 얘기 해준 거 고마워요." 부터
"딸 멀리 간다구 시루떡을 이 만큼 싸 온 거예요." 를 거쳐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잘 먹겠습니다 아부지, 잘 다녀오겠습니다 아부지, 다녀 올 때 까지 건강하세요 아부지, 그러는 건데. 아까 형 얘기 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땡큐." 까지.

(8부, 죽을 쑤어 자전거 타고 간 진헌의 오피스텔,)
머뭇거리다 벨을 누르는 장면 부터
같이 드세요.
김희진씨, 미안해요.
뭐가요?
그냥 미안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근데 한라산은, 한라산은 왜 같이 가자고 그런거야? 아직 잘 모르나 본데, 그건, 그건 있잖아.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그런 뜻이야, 알어?" 를 거쳐,
"한라산은 유희진씨랑 가." 까지.

(8부, 희진이에게 돌아가라며)
그래서 더 싫다.
딸 같은 며느리 들여 그 끔찍한  일 다시는 당하기 싫다.
그 동안 난 정 뗐다. (사진을 쓰다듬으며 우는 나사장)

(10부, ‘기둥’과 다시 만난 호텔 커피숍)
인애씨가 다쳤단 말야. 화상 당해서 베이커리 올스톱이야. 부터
사 입어라 좀.  
You are still shiny. That’s not what I meant, stupid anyway.
이 담배 같은 놈아. 를 거쳐
당신 매력 있어. 자기가 얼마나 매력 있는지 모르는 게 당신 매력이야. 까지.

***

하여튼, 무쟈게 따뜻한 드라마이다. 등장인물 누구도 음모를 꾸미지 않는다.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모든 갈등이 스르르 풀리는데, 그 감동의 중심에 삼순이 있다.

삼순과 인애 (객지생활하면 마음이 허해서 돌아서면 배고프고 그럴 거야.)
삼순과 영자 ('관절 치료'하러 간 무도회장에서 같은 처지가 된 후)
삼순과 헨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진헌과 헨리 (농구, 수영을 거쳐 '이건 이렇게 먹는 거야')
삼순과 채리 ('언니가 나를 자꾸 때렸으니까 식혜를 쏴라')
삼순과 현우 (오스카 와일드와 박봉숙 여사)
삼순과 희진 (비풍초똥팔삼, money를 거쳐)

가히 무소불능, 올마이티이다. 현실에서 이런 인간형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판타지일 밖에.  그 판타지를 많은 이들이 넋 놓고 봤다는 것은, 그리고 이리 실타래 인간관계에 능통한 삼순이를 '눈치가 없어서, 조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채용하지 않겠다는 인사담당자 설문 결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럴 정도로 현실에서는 외양을 보고 때려잡고 있다는 말이다.

누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주목 받는 생이고 싶다. 누구든 가슴에 보석이 묻혀 있지만 세상 빛을 보는 일은 드물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그대여, 다른 이의 외양, 조건으로써 그 이를 판단하지 말진저. 생활이 그대를 채근하여 판단을 재촉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여지를 두고 갈진저. 그래서 미움과 증오에 둘러싸여 고단해 하고 있다고 그대가 어느 날 판단해버린 이웃이, 따뜻한 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올마이티 삼순이로 날아다니는 꿈만은 깨우지 말진저.

 

2005.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