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감상문

하울의 움직이는 성 - by 토끼뿔

섬그늘 2008. 11. 13. 11:27

영화동아리 '끼노in그랑카페'에서 펌.

 

원문 :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lub_cinema&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47

 

제목 : 소피를 이해하기 (by 토끼뿔)

 

전에 교양수업으로 들은 아시아영화시간에 강사가 <키핑 더 페이스>라는 영화를 예를 들면서 인물의 캐릭터와 인물이 갖춘 조건을 알아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키핑 더 페이스>에서 에드워드 노튼의 직업인 신부와 벤스틸러의 랍비, 제나 엘프먼의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주인공이 저런 행동을 하고 주인공이 느낄 심리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영화속 인물들이 나타내는 행위는 그 인물이 갖춘 조건이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키핑 더 페이스>의 평이나 줄거리를 검색해보면 거의가 두 남자주인공을 "자신만만한 뉴욕의 독신남들...."이라는 식으로 소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건 얼토당토 않은 해설이다. 결국 그 해설대로 영화를 보면 뉴욕의 멋진 독신남(?) 신부(??)와 독신남 랍비(???)가 소꼽동무였던 캐리어우먼을 만나 파계에 이르는 코미디가 된다.

그치만 실제로 미국에서 신부와 랍비는 소수자이고 차별과 무한경쟁에 의한 사회 불안의 상징이다. 개신교가 국교나 다름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미국사회, 더구나 영구한 소수자로 자리잡을 성직을 선택한 젊은이의 불안과 갈등을 그린 미국사회풍자영화가 한국으로 건너와 졸지에 로맨틱코미디로 둔갑한 것이다. 만약 신부와 랍비가 소수자가 아니라면, 두 남자주인공이 겪는 장래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면 이들의 삼각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는 아주 섬세한 장치를 갖추고 있는데, 잘못 읽으면 그냥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에피소드로 둔갑하고 마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내가 사십방에 옮겨놓은 듀나라는 영화평론자의 글에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평하면서 소피의 행동중에 두가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들었다. 물론 그의 평대로 원작을 무시한 이야기구성으로 소피의 행동은 부드럽게 이야기속에 녹아들지는 않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해를 못한 것은 일본의 사회, 일본의 캐릭터, 일본사회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소피는 왜, 성을 파괴하는가?

소피는 이사를 한다.
이사는 하울이 정해준 방법에서 소피가 정하는 방법으로의 전환이다.
헐리우드영화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설치고 나서다가 꼭 일을 망치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미야자키의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나서지 않으면 될 일도 안된다.
언제나, 그녀가 구원이다. 아니, 그녀만이 구원이다.
소피는 성으로 도피해온 첫날부터 캘시퍼를 마음대로 다룰수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캘시퍼를 부추겨 이사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녀의 방법으로 질서를 다시 만들어 낸다.

소피는 왜 하울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일을 하는가?

황무지의 마녀는 젊은 심장을 탐낸다.
그녀는 이름조차 없는데, (처음에 황무지의 마녀로 불리다가 나중에 할머니로 불리운다) 그것은 보편성이고, 그 보편성의 하나는 탐욕이다.
저주를 퍼붓고 주술을 건 주제에 그것을 풀 줄도 모른다.
그리고 완전히 마력이 사라져 자기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때에도 심장에 대한 탐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탐욕으로 움켜진 심장을 놓지 못한다.
소피는 그걸 나무라지 않고 인정한다.
역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지혜로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탐욕을 나무라서 무엇할 것인가?
그러나 어쨌든 탐욕은 탐욕이고, 그걸 인정한 후에도 아니 인정한 후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연민은 버릴 수 없다.
심장을 움켜쥐고 뜨거워 어쩔 줄 모르는 마녀, 그러나 탐욕때문에 놓을 수 없이 그냥 뜨겁다고 비명만 지른다.
소피가 마녀를 구할 방법은 캘시퍼를 식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만약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왕의 계단을 오르는 장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에게 저주를 건 마녀에게 좀더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는 그런 소피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피는 하울을 만난 순간 이해한 것이다.
하울을 이해한 순간 마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녀가 가진 하울을 향한 사랑과 사랑에 눈먼 탐욕을..........
그것은 일본사회가 사회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도덕률과 닮아 있다.
숙명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의 숙명에 대해 이해하고 서둘러(!) 그것들과 화해하라.

미야자키는 여전히 성장을 말하고 있다.
조금 삐걱거리는 하울의 성처럼 미야자키의 방향도 약간 삐걱거리고 허술하긴 하지만, 성이 재구성되듯이 미야자키의 이야기세계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변화와 새로움을 보여주는 것이 미덕인 나라가 있지만,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도 있다.

"김현의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덧붙이는 부분
그가 말하길, 나쁜 게임은 규칙을 위반하는 척하면서 서둘러 규칙으로 돌아오는 게임이다. 그런 게임은 규칙을 위반하는 척하면서 규칙을 두둔하고 그것과 화해하길 강요한다. 그것은 거짓화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나쁜 게임에 속한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영화가 좋은 게임-혹은 착한 게임-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소피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늙어 버려서 좋은 점은 더이상 아무 것에도 놀라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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