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감상문

하울의 움직이는 성 ( )

섬그늘 2008. 11. 13. 11:27

영화관에서 4년 전 가족과 봤을 때는 감상포인트를 못 잡았었던, '심오한' 영화. 알고 보니 western의 원작 소설을 기초로 해서 지브리 스튜디오가 나름의 철학을 담아 만들었기에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혹평도 있었던 작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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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극을 보면 사다메(定め;숙명)란 말이 참 많이 나온다. 이건 운명과는 또 달라 일단 한 번 정해지면 자신이 뭔가 노력하고 길을 개척해도 바꿀 수 없는 유형으로, 에도 이후 일본 사회의 구성원들이 체득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일종으로 나는 이해한다. '주어진 틀, 질서'안에서 살라는 거다. 그러니 상대가 어떤 '사다메'를 갖고 있든 그 이의 잘못은 아니며 아예 원인을 따질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상대가 어떤 처지인지, 어떤 '사다메'를 타고 났는지 재빨리 간파하고 서둘러 그 '사다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이 일본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도덕률이 된다 (by 토끼뿔). 그런 약속을 바탕으로 굴러가는 사회라는 거다.

 

황무지 마녀의 저주를 받아 노파의 모습이 되어 버린 소피는 처음 하루 정도만 당황모드, 이후 무쟈게 빨리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적응한다. 그거이 가능한 것은 그 변화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주어진 틀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당장 저주를 풀 방법을 알지도 못하는 바 안달한다고 뭔가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는 거다. 그렇다고 체념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 영영 저주가 풀리지 않으리라는 확증도 없다. 따라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 된다. 그래서 소피는 길을 떠나고 허수아비의 도움을 받아 성의 청소부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은 만나는 모든 캐릭들에 끊임없이 진정을 전한다. 그 결과 모든 갈등을 없애고 모든 이와 친구가 되며 결국 세상을 구원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달하는 시간을 무한으로 두고  끊임 없이 발현하는 진정이다. 며칠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에게 아무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을 전할 수 있는가? 현실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상대와 나의 '사다메'를 일단 이해한다면 주어진 틀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전심전력(背いっぱい)을 다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는 거다. 그러다 보면 그 진정은 언젠가는 보답을 받는다고 영화(하울, 센과 치히로)는 이야기한다.

 

이 사고방식은 매우 안온하다. 일체의 환경이 내 잘잘못과 관계 없이 주어진 것이며, 그 주어진 틀 내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해진다, 따라서 안달할 효용이 없다는, 구성원들이 매우 속 편한 세계관을 갖게 한다. 결점이라면야 '주어진 틀'이 어느 넘인가가 구조적으로 잘못 만든 것일 경우 재앙을 가져온다는 점. '사다메'의 나라에서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해결을 모색하면 일신의 안위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을 경우 '사다메'는 매우 우아하게 현실 도피를 가능하게 한다. 뭐, 어떤 체제이데올로기가 그렇지 않겠냐만. (일본 역시 왕을 죽인 역사가 없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주의자 하울이 지킬 것이 생겨 바뀌는 과정 - 가족이란 소중한 것이라는 또 하나 지브리스튜디오가 유구장장 울궈먹고 있는 소재인데 더 두들기기 귀찮아 생략함. 미완성으로 내비둘 생각이며 언제 또 맘이 바뀌어 손 볼지는 뉘도 모름.

 

소피의 대사 중, 늙어서 좋은 점 두 가지, 1. 놀랄 일이 없다는 점, 2.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