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내키는대로

봄비, 낙화(落花)

섬그늘 2009. 4. 1. 22:08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영상 8도에 내리는 비를 봄비라고 일컫는 것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4월1일 내리는 비니까 4지선다형 중에서는 봄비가 정해일 가능성이 무쟈게 높겠다. 그닥 나이 먹은 것도 아닌데 이즈음이면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 ; 당나라 시인 동방규 작품이라고 함. 전문은 http://blog.daum.net/xulaoshi/16503977?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xulaoshi%2F16503977) 는 구절이 떠오른다. 아마도 몸도 마음도 추운 게지.

 

성장기 고등핵교 댕길 때 국어책에서 배운 기억인 이수복 시인의 '봄비'(1969)가 덩달아 연상된다. 

 

<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고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 비 그치면...왜 그 이는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이라고 적었을까? 그 이가 순천고등학교 교사였다는 사실에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떠올리곤 한다. 벌교가 가깝잖아?

 

이 비 그치면...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이미 일본 기상청은 '동경에 벚꽃이 피었다'라고 선언(기준은 야스쿠니 신사의 벚꽃나무)했는데, 본격적인 개화는 예년보다 1주일 정도 늦는단다. 어쨌든 그 선언 듣고 사람들은 꽃구경(花見み;hanami)을 준비하는 나라이다.  이 즈음의 3월27일은 '사쿠라의 날'이란다. 왜냐면 0~9 숫자 중 '사;さ'에 근접하는 것이 3이요, 꽃이 '피다'는 '咲く;saku'를 숫자로 표현하면 39, 39=27이므로 3월27일이란다. '토목(土木)의 날'을 11월18일로 잡은 것과 비슷한, 기발한 말장난이다.

 

예쁘게 피었다가 화끈하게 꽃잎이 떨어지는 벚꽃의 이미지는 이른바 '장자연리스트'까지 사유를 옮긴다. 28세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그 이가 겪었을 절망감의 깊이란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내 둘째 아이가 좋아한다는 자우림의 '낙화;落花'와 그 이의 공통점은 부당한 권력과 사회 구조에 절망하여 다른 세상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리 선택하며 고인은 무언가 세상의 메아리를 소망했을 게다. 그렇다면 그 죽음으로부터 개인과 사회는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올해 중2가 되는 둘째 아이와 조만간 토론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실명을 써도 괜찮은 것일까? 검색만 하면 고인의 사진을 담은 몇 페이지 후딱 넘어가는 분량의 게시물이 뜨는 지금 유족의 고통은 남의 일일까? 자본주의 외에 대안이 없는 세상에 사는 한 성상품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권력의 압력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 개체의 선택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소유에 대비되는 존재를 추구하는 삶이 밥그릇과 배치되는 현실은 어떻게 소화해야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인가? 상납이라는 사회 현상은 당췌 왜 발생하는가? 자발적 의지로 재화를 목적으로 몸을 파는 행위는 사는 이의 욕구를 충족한다고 할 때 수요공급이 만나는 경제행위라고 볼 수 있다고 치자, 근데 왜 대한민국은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하는가? 따위. 어떤 수준까지 아이가 견뎌낼지 몰겄다.

 

그 이가 남겼다는 리스트로 인해 촉발된 지금 사안은 10여 년 전 'O양 비디오'와는 또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관음증이 한 개체를 인격살해한 사건이었으며 그것이 가능하게 한 야만적인 사회에 나 또한 별 문제의식 없이 살고 있다는 자각에 기분 더러웠던, 다수가 행하는 폭력의 범주였다. 지금도 나 또한 그 다수의 일원이 되어 별 의식 없이 안주 거리로 리스트의 인물들이 행했을 일들을 상상하며 씹어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지난 주 지인과 밥을 먹으며 리스트의 인물들이 누구누구란 말을 들었다. 겉으로야 아, 그러냐? 호기심을 발하는 얼굴로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어느 정도에서 대화를 돌려야 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은 절충을 만들 것인가 궁리해야 하는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회피 역시 집착의 변형이라고 하니 도를 몇 십년 더 닦는다 한들 존재를 돌보는 삶에 근접하기나 할까 의문이다.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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