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일본아 놀자

수치의 문화

섬그늘 2008. 11. 18. 13:24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1402&eid=L6h9YFPfNv6oFsXc6OgaFjeesqu9zXZF

 

일본말에서 '수치를 모르는 이(恥知らず)'와 '의리를 모르는 이(義理知らず)'는 심각한 수준의 욕입니다. 루스 베네딕트가 지은 '국화와 칼'에 둘 다 등장하는데, 쉽게 쓸 수 있을 정도로 제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통하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화와 칼' 후반부에 지은이는 서구의 문화를 '죄의 문화', 일본 문화를 '수치의 문화'로 대별하지요. 우선 서구에는 십계명 따위가 있습니다. 즉 도둑질은 죄라고 규정되어 있지요. 그래서 서구에서 도둑질을 한 이는 죄를 지었다는 양심의 소리,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다시 말해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지침이 선악의 기준이 됩니다.

 

반면 일본에서 선악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사회의 규범이 존재하고 그 잣대로, 그 규범을 잘 지키는지 다른 사람을 평가합니다. 한 사람의 인간성이 어떤지 주위가 평가한다는 뜻이지요. 즉 서구와 같이 인간의 행동을 옳다 그르다 판별할 절대적인 기준이 없고 다수의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 착한 사람인 겁니다.

 

도둑질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만약 들키면 그 사람은 수치를 느낍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착한 사람이며, 수치를 느끼지 않습니다. 선악의 기준이 되는 다른 사람의 눈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양심의 가책 역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일본사회에 많이 등장하는 원조교제, 불륜을 설명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들키지 않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서구 기준으로 인격이 훌륭하고 언동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연유에서든 주위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그 사회에서 원만히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웃에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끊임없이 주위의 눈을 의식하며 어릴 때 부터 '다른 이에게 폐(迷惑;めいわく)를 끼치면 안된다'라는 교육을 받습니다.

 

이렇듯 일본 사람은 일본 사회의 규범에 비추어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평가합니다. 일본 사회의 규범 중 중요한 것으로 온(恩), 의(義), 의무(義務), 의리(義理) 따위가 있습니다. (모두 조금씩 다릅니다. 이 중 온(恩)이 가장 상급개념, 이후 적은 순서대로 내려가며 의리(義理)가 가장 하급개념입니다) 모두 살아가면서 그 존재를 항상 인식하고 갚아나가야 하는 빚의 성격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위 개념이 적용되는 존재들을 개무시하면) 기본이 안되어 있는 사람으로 낙인 찍힙니다. 결국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치스러운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수치를 모르는 이(恥知らず)'가 되어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지지요. 넓은 의미의 규범이 있고 그 규범을 지키는지 않는지 서로 감시하는 관계의 문화입니다.

 

죄의 문화든 수치의 문화든 '문화'입니다. 어느 문화가 더 우수하냐 열등하냐 따질 일은 아니지요(장단점이 둘 다 있습니다). 특정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원에게 윤리의식을 교육하고 강제하느냐 방식 차이입니다. 다만 그 문화권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우냐를 이해할수록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쉽다는 정도이겠습니다.

 

예로써 서구의 '죄의 문화'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을 만들어 냅니다. 반면 '수치의 문화'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협동심 빵빵한 '조직'을 만들어 내지요. 한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의 문화든 두 가지 요소를 일정비율 씩 갖고 있을 겁니다. (2008.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