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일본아 놀자

11월03일 - 일본 문화의 날

섬그늘 2009. 10. 28. 11:07

매년 11월03일, 일본은 '문화의 날'이라고 해서 공휴일이다.

 

일본의 대부분 휴일이 xx월 둘째주 월요일 식으로 주말에 붙여 연휴를 만드는 방향으로 개정된 것(체육의 날, 경로의 날, 바다의 날 따위)에 비해 11월3일은 반드시 그 날에 논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메이지 천황 생일이요, 제국헌법 공표일이기 때문이다. (딱 6개월 후인 05월03일에 발효되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헌법기념일'로 날짜 지정 공휴일이다. 이른바 '골든위크'의 중심.) 근데 일본 사람들에게 '메이지 천황 탄생일이라매?'라고 물으면 '어...그런가?' 대개 반문한다. 먹고 살만 하니 관심이 없는 게지.

 

한국에서 11월03일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물론 휴일은 아니다. 예전 '광주학생의거일'로 기념했었는데 언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키워드 검색을 하여 확인한 바 11월03일 의거가 발생한 것은 해프닝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발단이 된 조선여학생 희롱사건이 10월29일 발생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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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앞서 10월26일은 한국 근대사에 큰 사건 두 가지가 발생한 날이다. 하나는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삔역에서 저격한 날이요, 하나는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은 날이다. 전자는 올해 100주년이요, 후자는 올해 30주년이라지. (하도 포탈에서 떠들어댄 덕에 나는 올해에야 두 날이 같은 날인 줄 알았다)

 

저번 주 지인으로부터 왜 그 두 날이 같은 날인지 이제껏 몰랐을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항...100주년이라 여러 매체가 다루었기 때문인갑다...정도로 결론을 맺었다. 그 와중에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 이야기가 거의 필연적으로 나왔다. 나야 예전 영화관에서 예고편을 보고 내 취향이 아니거니 한 기억인데 한국에서는 TV에 몇번 방송이 되었나 보다. 듣자 하니 꽤나 흥미로운 설정인지라 다운로드, 거진 두시간을 투자해서 봤다.

 

뭐, 영화평은 생략한다. 액션 장면은 볼 만 하오나...미안한 이야기지만 주조연급 연기가 내게는 너무 어설펐던 것. 그나마 여자주연을 맡은 오혜린 역 서진호씨의 미모와 일본 배우 나카무라 사토루의 연기에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그런 유형의 애국심 코드가 절절이 깔려 심금을 울리고자 의도된 저작에는 체질적으로 반감이 가는 성향이 된 지 오래이다. (쉬리, 태극기 날리며, 프로스펙스 광고 따위)

 

의아했던 것은 한국 배우가 극중 일본인으로서 쓰는 일본말에 대해 내가 느끼는 위화감이었다. 설정으로는 자연스러워야 하건만 발음이 영 아니더라는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만. 몇 달 했다고 본토 발음이 나오겠는가...) 건데, 2년 전 본 일본영화 '박치기'에서 재일 한국인이 쓰는 어눌한 한국말에는 전혀 생경하지 않았으매 그 차이가 뭘까 했더니 실제 그 이들이 쓰는 한국말이 그러하더라, 그러니까 같이 어눌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여기느냐 아니냐 차이이지 싶다.

 

내가 그 영화에 시간을 투자한 것은 지인이 전해 준 영화의 설정, 1909년 이토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로직이 궁금해서인데, 영화의 초입 달랑 3분 정도에

 

1.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려 무리하지 않는다 (걍 놔 두고 속국으로 만듬)

2. 내실을 다지다 일본이 1936년? 연합군으로 참전, 승전국이 된다. 1960년? UN 상임이사국이 됨.

3. 2002년 일본 월드컵이 열린다. (이동국?이 일장기를 달고 뛰는 장면으로 오프닝 마감)

 

으로 처리했더라. 당췌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성향이길래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냐고요...허탈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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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네이버에서 '프로파겐더'란 글을 쓰며 안중근'의사'를 지칭할 때 인용부호를 붙인 바 있고 이 글에서도 그렇다. 철 들며 배운 바 '의사'를 붙이지 않으면 엄청 불경한 느낌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지. 근데 이 글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있으며 한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침략의 원흉'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현상은 부당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적기 위함인 바 인용부호를 붙이는 것이 낫겠다.

 

다만 오해는 마시라. 안중근'의사'의 '의거'에 토를 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며, 내가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식의 '오류로부터 해방된 자아', 되도록 사실관계에 근거한 균형 잡힌 인식을 추구하는 목적이 더 크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 매파에 대립하는 비둘기파 (대화파, 협상파)였고 조선을 일본처럼 발전시켜 글자에 걸맞는 '근대화'를 추진, 제2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킬 목적이었단다. ('현대일본을 찾아서 1, 2)

 

뭐, 침략론을 유보했다 뿐이지 뿌리까지 조선을 일본과는 독립된 나라로 취급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침략의 원흉'은 맞는 말이겠지만 등급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그리 이야기하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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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5걸'에 속한다. 그 중 '메이지 3걸'인 사이고 타카모리, 오오쿠보 토시미츠, 키도 타카요시가 활동할 때는 청년기 초입으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다. ('료마가 간다'에서는 청년기의 '이토 슌스케'가 죠슈번의 카츠라고고로(후일의 키도 타카요시)의 심부름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일을 돕는 장면이 몇 나온다) 

 

그러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외국 물을 먹고 온 후, 사이고 타카모리가 사표 쓰고 물러난 후 키도 타카요시, 오오쿠보 토시미츠의 뒤를 이어 메이지 유신을 완성하는 주역이 된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메이지 헌법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메이지 내각의 초대, 그 이후로도 세번, 총 4회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1963년~1984년까지 1,000엔권 지폐에 이 사람의 초상이 실렸단다. (그걸 바꾼 것은 그 시점 한국을 의식했다는 말도 되겠다.)

 

그가 급부상한 배경에는 당시 조선을 언제 먹느냐 하는, '정한론'을 둘러싼 대립이 있다. 정한론, 조선을 정벌하여 힘을 키우고 (물자, 인력...) 구미 열강에 대항하자는 소리는 메이지유신 이후에 대두되었으며 적극 호응한 이가 사이고 타카모리란다. (일본 만원권 지폐에 지금 실려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도 정한론자였다고 함) 지금 내가 생각해도 유신을 성공시킨 이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니, 아마도 당시 일본의 식자층 사이에서는 정한론이 대세였을 게라.

 

정한론 (다음 백과사전)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1508a

 

근데 외국 문물을 보고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은 모두 조선 정벌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한다. 열강의 실력을 눈으로 보니 일본은 아직 멀었다는 것. 내실을 보다 다져야 한다며 당시 실력자 중 하나였던 오오쿠보 토시미츠도 반대파. 메이지 천황이 결국 손을 들어줬는지 어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국 사이고 타카모리가 사표를 쓰고 정계에서 물러나고, 세이난(서남) 전쟁을 일으켜 생을 마감한다. (사이고 타카모리가 은퇴한 것은 오오쿠보 토시미츠 등 메이지 창업공신들의 사치 행각에 환멸을 느껴서라는 설도 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어느 정도 내실이 다져졌다고 판단했는지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통감으로 1905년 보내는데, 이토는 끝까지 한일합방은 득책이 아니라고 반대했단다. 굳이 한 나라로 만들어 저항을 자초하고 일본의 힘을 소진하지 않더라도 일본 맘대로 주무를 길은 많았다는 논리로 나는 추정한다. 여하튼 이토는 일본의 강경론자와 조선의 반일세력 사이에 끼여 (조선을 먼저 근대화해보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통감 자리를 물러난 후 1909년 죽는다.

 

이토히로부미

브리태니커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666b

한국위키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X719

일본위키    : http://ja.wikipedia.org/wiki/%E4%BC%8A%E8%97%A4%E5%8D%9A%E6%96%87

 

이토의 죽음으로 일본의 강경론자가 득세, 한일합방 (1910년)은 앞당겨진 측면이 있으니, 참으로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뭐, 그런 측면을 중시하여 안중근'의사'의 행위가 폄하할 바는 아니겠지만 글타고 영화처럼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성공했었어야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설정은 상당량 논리의 비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라고 인용부호를 단 것은 위 링크 정도만 참조한 현재의 결과물이며 아주 나중 공부가 깊어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도망갈 구멍을 판 게다.

 

누누히 말하건대 자료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대개의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 주입식이든 뭐든 각인된 인식을 재점검하고 주체적으로 한 세상 살려면 시간을 투자해 따분하기 그지 없는 역사를 뒤져야 한다. 왜냐면 한국사든 일본사든 아직까지는 승리한 넘이 칼질해 먹기 좋게끔 포장한 인스턴트 식품이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몸엔 안 좋다지만 맛은 좋잖아?

 

여하튼 11월03일은 일본이 제국헌법을 공표한 날이다. 문제는 그걸 맥아더가 갈아 엎어 지금 일본의 헌법은 일본인의 그것이 아닌데 (물론 메이지시대 제국헌법과 판이), 이 날을 공휴일로 두고 5월3일을 헌법기념일로 두는 이들의 멘탈리티를 생각하면 딱하기 그지 없다. 남의 일이 아닌 거야. (200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