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감상문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 司馬遼太郎 지음) - 2 (양이派)

섬그늘 2009. 7. 13. 19:48

 

2. 외국과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른바 서양 열강의 대표선수 미국의 페리가 대통령 친서를 들고 1853년 일본에 내항, 나라 문을 열라고 윽박지른다. 막부의 노쥬(老中;roujyuu, 지금의 장관), 아베 마사히로(;abe masahiro)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거덜난 것을 알기에 개기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반대파 역시 많다. 겪은 적이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은 어떤 의사소통을 우주와 하여 판단에 이를 것인가?

 

(참고로 아베는 20세에 견습 寺社奉行(jisyabugyou)가 된다. 종교법인 담당 공무원인 셈인데 오오쿠 여인네들이 사찰에 불공 드리러 가서 중들과 신나게 놀아났다는 걸 알고 처분을 내리는데, 쇼군의 관리 잘못이 드러나지 않도록 중들만 처형, 오오쿠는 별로 건드리지 않았단다. 이것이 쇼군의 눈에 들어 25세 젊은 나이에 노쥬가 된다. 아마 이런 탓에 드라마 아츠히메에서 아베가 오오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묘사된 듯 싶다.)

 

(1)   부파

 

막부는 천황으로부터 일본을 통치하라는 위임을 받은 형태로 정치를 담당한 조직이다. 그 대빵이 쇼군이며 대대로 토쿠가와(徳川)가의 자손이 임명되고 있다. 12대 이에요시(家慶)가 페리 내항한 20일 이후 돌연사 해버려서리 13대 이에사다(家定)가 취임한다. 그 시대 일본을 다스리는 처지인지라 자원, 정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다. 따라서 외국 열강에 개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다. 다만 토쿠가와가가 계속 가져 왔던 기득권을 내 놓기는 싫다. 토쿠가와를 섬기는 직속 무사인 하타모토(旗本) 8만 명이다. 토쿠가와가 움직이는 녹봉 400만석 (지금 가치로는 4,000,000 * 160kg * 1,000/kg = 6,400억원)을 나눠 먹고 사는, 딸린 식구 수가 많다.

 

문제는 막부 내에도 물정 모르는 노친네 (특히 미토(水戸)번주 토쿠가와 나리아키)들이 있어 외국 함대랑 싸워 이기면 될 것 아니냐고 큰소리친다. 더구나 교토에 있는 천황과 조정의 공경들은 더욱 무지하여 외국인이라면 벌레 보듯이 하며, 신의 은총을 받은 나라 일본이 질 리 없다고 믿고 있다. 막부가 홀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외교는 사전에 천황의 허락을 받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막부는 이런 사람들 살살 달래서 큰 문제 없도록 눈 앞의 위험을 회피해야 하는 처지이다.

 

여기까지가 쇼군(노쥬들에게 정치를 맡겨 놓았을 따름, 스스로 판단 능력이 있었을지는 의문. 다만 마지막 15대 쇼군 요시노부(慶喜)는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과 노쥬들의 생각. 거기에다가 막부(=나랏님)가 잘못 판단할 리 없다, 새로운 세력이 정치를 맡는단들 막부 보다 잘 한다는 보장이 없다, 위기일수록 현재 맡고 있는 막부를 밀어줘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로 외국 문물을 접할 기회가 없고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민중 계층이거나 막부에 대대로 충성을 다짐해 온 시골 사무라이들이다. 어차피 안 가 본 길이잖아?

 

막부의 방대한 행정 치안 조직, 그 중 막부 직속으로 한 군사력 자랑했던 아이즈 번, 쿠와나 번, 자생적으로 막부에 충성을 다짐한 신센구미(新撰組)류가 이에 해당한다. 앞서 말한 사쿠마쇼잔은 이 첫 부류를 낡은 껍질 속에 들어 앉아 그대로 가려는 인간들이라고 혹평한다. 150년 지난 지금 전지적 관점으로 평하면 막부의 문제점은 정보는 있었으나 기득권에 연연했다는 데 있다.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았으면 그에 상응하여 체제를 정비할 일이었거늘, 후다이(譜代)니 토자마(外様)니 신분에 얽매여 정치 개혁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게다.

 

특히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이 사람은 후다이 다이묘 히코네(彦根) 번 출신 재상(大老;tairou)으로서, (막부)이 잘 알아서 (그러나 일방적으로) 정할 테니 무조건 따르라는 강경파 노선을 걷는다. 반대파인 히토츠바시(一ツ橋)파의 주장과 철저히 거꾸로 가는 의사결정을 하는 바, 토자마 다이묘의 막정 참가 불허, 천황의 칙허 없이 (불평등)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안세의 대옥으로 공포 정치, 공무합체 추진 따위를 하는 바람에 결국은 자신의 죽음은 물론 막부의 종말을 재촉한다. 능력 없는 주제를 모르고 강경일변도로 가는 캐릭터, 어디서 많이 본, 정겨운 풍경 아닌가?

 

(2)   존왕양이파

 

외국 오랑캐 말을 들어 개국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이 세운 나라 일본은 외국 적을 물리칠 수 있으며, 외국의 무리한 요구에 벌벌 떨며 들어주자는 막부는 무능하니 정권을 내 놓아야 한다, 막부와 조정(천황)의 판단이 다르다면 당연히 천황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존왕;尊王)는 논지의 주장이다. ,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 역시 가진 정보의 폭과 깊이, 신념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 260년간 닫고 잘 살아오던 나라를 왜 갑자기 열어야 한단 말이냐? 그까짓 오랑캐 따위 때려 주면 물러갈 것 아니냐? 막부가 알아서 하라고 정치를 위임했거늘, 그렇게 능력이 없단 말이냐? 막부가 양이할 자신이 없다면 천황을 중심으로 새 정치를 하도록 해야 한다 따위, 양이파의 논리에 틀린 구석이 별로 없는 바 당시 존왕양이는 식자층의 상식이요, 대세였다고 한다. 막부는 외국과 양이파 사이에 끼여 양쪽을 달래며 현상을 넘기기 급급하다가 이이 나오스케 정권이 들어서서 무자비한 탄압을 반대파에 가한 것이지.

 

무능한 막부는 물러나라는 취지의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반체제 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통점은 토쿠가와 막부 중심의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그룹이라는 점이다.

 

그 첫째가 토자마 집안의 번(;han). 1600년 세키가하라(;sekigahara) 전투 이후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 에도 시대를 열었는데 그 전투 이전에도 대대로 토쿠가와를 섬기던 다이묘를 후다이(譜代 ;hudai), 예전엔 적이었다가 그 전투를 계기로 가신이 된, 토자마(外様;tozama)(밖에서 들어온 분)는 같은 개국공신이라도 등급과 대우가 달랐다. 밖에서 굴러 들어온 돌은 언제든 배반을 때릴 수 있다는 경계감.

 

긴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그리 되는 것인지, 1850년대 이후 후다이 측에서는 인물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 대대로 푸대접을 받아온 토자마 측에서는 시마즈 나리아키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 등 출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노쥬 아베는 이런 유력 번을 막정에 끌어들이려 연합을 추진하는데 이들이 히토츠바시파. 결국 남기슈의 이이 나오스케가 집권하며 이 세력을 철저히 누름으로써 유력 번 중 한 군사력 자랑하던 사츠마(薩摩)는 막부에 비협조적이 되게 되며 나아가 존왕양이(=막부 타도)의 핵심세력이 되어 버린다.

 

(오류 바로 잡음 : 마츠다이라 요시나가는 후다이 다이묘, 아래 샤힌님 댓글 참조. 후다이 다이묘의 정의와 리스트 링크 : http://ja.wikipedia.org/wiki/%E8%AD%9C%E4%BB%A3%E5%A4%A7%E5%90%8D)

 

둘째로 사츠마와 마찬가지의 토자마 집안인 조슈(長州), 이 동네는 모리(毛利;mouri) 집안이 700년 이상 다스리는 지역인데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 진영이었지만 실상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단다. 글치만 패전 후 찬밥 신세가 되었고 토쿠가와 가로부터 불이익을 계속 받는다. 그러니 막부에 대해 좋은 감정일 리가 없고 가장 과격한 반체제 인사들이  왕창 배출된다. 사츠마가 그래도 세력 판도의 강약에 따라 전략적 선택을 바꾸어 나가는 실리노선인 반면 조슈의 존왕양이파는 일편단심 천황만을 향해 한 몸 아낌 없이 불사르는 우국지사형이었단다.

 

(사실 애초 양이파의 발상지는 미토(水戸) (지금의 이바라기(茨城))이었는데, 토쿠가와 家인 주제에 양이론에 경도된,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내부에서 치고 받다가 세월 다 보냈고 메이지 전야의 전체 그림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보잘 것 없어 보인다. 보다 못해 번을 박차고 나간 脱藩(탈번;당시로는 범죄였음) 로시(浪士)들이 주축이 된 사쿠라다(桜田)문의 변을 일으키고 극렬한 막부의 탄압을 받은 이후 미토의 이름은 보기 어렵다.)

 

더구나 조슈 번의 번주를 포함한 상층부 당시 분별력이 별로 없었서리 양이파 무사들이 진언하는대로 왔다리 갔다리 한 모양이다. 심지어 막부를 제끼고 쇼군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는 설도 있다. 냉철한 시국관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물불 가리지 않을 우국지사가 득시글대는 곳, 항차 종교 차원의 순교 수준까지 발전한 멘탈리티가 가장 넘쳐났던 곳이 조슈이다. (이 부분을 시바료타로는 태평양전쟁의 원동력이라 냉소적으로 자신의 작품 곳곳에 썼으며, 반대자들로부터 자학사관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단다.)

 

마지막 세번째 부류의 존왕양이파가 토사근왕당(土佐謹王党)이다. 토사가 묘한 지역인 것이,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야마우치 카츠토요(山内一豊;2006 NHK대하드라마 功名が辻의 남자 주인공)부임한 후다이 집안이다. 문제는 밖에서 굴러 들어온 야마우치 집안이 박혀 있던 토족들을 진압, 뿌리 깊은 계급사회를 만든 곳이라는 거다. 따라서 하층 계급인 고시(郷士)는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며 주군인 야마우치 집안에 대해 조상 대대로 원한을 품고 있었단다.

 

(역시 오류. 야마우치家는 토자마였음. 아래 샤힌님의 댓글 참조. 토자마 링크 : http://ja.wikipedia.org/wiki/%E5%A4%96%E6%A7%98%E5%A4%A7%E5%90%8D)

 

근왕은 존왕보다 한 술 더 떠서,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고 서명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누구보다 먼저 서명했지만 탈번하면서 곧 노선을 달리했고 그의 절친한 친구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가 지도자 역할을 하며 끝까지 열정을 불사른다. 이 아저씨들의 공통점 역시 당시 막부 정치까지 갈 것도 없이 번의 정치에 관여할 주제가 아니었는데 양이론에 경도되어 신념을 갖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3)   3의 길

 

부파는 개국과 기존 체제의 유지, 존왕양이파는 양이(쇄국)과 기존 체제 타파를 지향한 반면, 그렇게 둘이 부딪히면 내전이 일어날 수 밖에 없잖아? 누구 좋으라고? 하며 다른 길을 모색한 사람들이 있었다. 개국과 기존 체제의 타파, 요즘 말로 고상하게 표현하면 hybrid, 알기 쉽게 무식한 표현으로는 짬뽕 해법쯤 되겠다. 적극적 양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내부는 단합하여 우선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

 

외국을 물리치기 위해(양이) 외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발상이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외국 문물을 접한 경험이 있는 이로서 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사쿠마 쇼잔, , 카츠 가이슈(勝海舟),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카모토 료마 등이 있다. 이 중 앞의 두 사람은 막부에 종사하는 막료인 바 그 만큼 독특한 캐릭터이고, 뒤의 두 사람은 각각 30, 33세에 참수, 암살당해 세상을 떠난 바, 불꽃처럼 한 세상 살다 갔다는 이야기. 료마의 경우 만민평등 사상에 도달한 것이 마지막 3년 남짓으로 보인다.

 

여하튼 료마가 간다는 이 세 부류 노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서로 어울리고 때로 반목하며 어떤 때는 힘을 합하여 다른 한 편을 궁지에 몰아 넣는 이합집산의 이야기이며, 특히 사카모토 료마가 각지의 스승을 만나 깨닫고 세계관을 하염없이 다듬으며 주위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주위 모든 이,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1868년 보신(戊辰)전쟁을 끝으로 메이지 유신, 신정부의 주요 인물이 된다.

 

소설에서 '일본인'이란 표현을 료마가 처음 쓴 것으로 묘사된다. 당시는 어떤 번 출신이 인물의 정체성 중 큰 부분을 차지했고 모두가 같은 천황의 백성이라는 인식은 없었다나 보다. 하급 무사 계급 출신이어서, 그리고 일찌감치 탓판(탈번)한 탓에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듯 현상을 관조하여 그런 평등의식을 갖게 되고, 좁은 땅 덩어리 안에서 동족끼리 싸울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

 

대정봉환을 전후하여, 사츠마는 영국과 긴밀한 관계, 막부는 프랑스의 자금을 받는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니 내란이 본격적으로 붙었으면 열강이 개입할 명분이 생겼을 게다. 그걸 어느 정도는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막았지만 그들이 암살로 죽은 이후 (막부의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설이 유력) 무진(茂辰)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의 집합이지만 당시 막부세력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는 뜻이 되나 보다. 호시탐탐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해야 혁명이 완성된다고 믿는 사츠마, 조슈를 말리며 내전 없는 무혈 혁명을 지향한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가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 사이 완충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

 

에도에서 막부의 권위를 조롱하듯 대포 쏘고 도망가는 사건이 이어졌고 도망자들이 모두 사츠마 번저로 숨더라는 것. 그래서 사츠마 번저에 화공을 퍼부어 사츠마 사망자 64명, 막부측 11명. 이후 오사카 성에서는 격론 끝에 사츠마를 손봐 주어야 한다고 병사를 모아 쿄토로 진군했다는 거다. 이미 요시노부가 탈관직, 봉토 반환에 동의한 직후인데 왜 그 진군은 묵인했을까?

 

결국 토바후시미 전투로 이어지고 무진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된다. 하여튼 이건 강경론자들 주위에 균형감각을 갖춘 이들이 없으면 거의 항상 비극이 야기된다는 사례로 쓰일 수 있겠다. 명분은 사츠마를 혼내 준다는 것이지만 쿄토를 봉쇄함으로써 권토중래를 꿈꿀 수도 있었을 게다. 그 속셈 서로 뻔히 아는 처지인지라 (게다가 사츠마는 그렇게 막부가 발작하도록 공작한 것이므로) 한바탕 붙도록 되어 있던 게다.

 

어차피 무력으로 끝까지 가서 쓴 맛을 본 이후에야 승복하는 법. 우연으로 포장된 필연. 토바후시미 전투 패배 후 요시노부가 에도로 도망간 심리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될 듯 하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천황의 위임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던 쇼군이었는데 졸지에 '조정의 적'이 되어 버렸고 기세 싸움에서 져 버린 것 이다.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교토로 진군했을 터, 생각하지도 못한 사태였던 게지. 그렇다고 계속 자신이 대빵으로서 '관군'에 개길 수는 없는 일이었으리라.

 

***

 

쓰잘 데 없이 길어졌다. 하도 벌여 놓아 수습이 감당 불능 지경. 소설 줄거리나 료마의 생애는 알아서들 읽어 보시라. 다음에 쓸 마지막 편에서는 료마가 이 시대로 점프했다면? 내가 료마라면? 가정법 과거는 항상 허무한 법이지만 북핵, 한국의 교육, 작금 경제위기를 보는 내 시각을 읊어보려고 한다. , 그것이 언제가 될 지는 며느리도 모르지만. (2009.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