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까락 운동/방사능

명태, 검푸른 바다 (광우병과 세슘)

섬그늘 2013. 11. 29. 08:56

(지난 2013년 11월11일, 내가 '방사능 식품' 논란을 정면으로 보자고 생각한 지 2주 째, 그간 인식이 흐르며 닿은 지점의 기록이다.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1. 광우병

"변형프리온은 세상에 널려 있다. 한 분자라도 '제대로' 맞으면 인간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한 분자라도 빠짐 없이 찾아낼 측정기란 없다. 인류가 아직 그 수준까지 가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도 수입검사는 해야 한다. 단, 검출되지 않았다 해서 그 소고기가 100%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가 내 '상식'이다. 2008년 그 논란에 들어가 부딪히고 때로 깨지며 형성된 인식이다.

변형프리온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점은, 유럽 광우병 쇠고기가 유통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검출한계 이하인지라, 식품 어디에 얼마 만큼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식품 원재료에 쓰이는 탓에 전혀 먹지 않고 전혀 마시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당면한 위험의 정도를 밝히고 개인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 사는 한, 그 정도 위험은

별 도리 없기에 감수하고 사는 거다. 대부분 사람이 일상적으로 위험을 대하는 태도이다.


2. 세슘

"세슘은 인공방사능 물질이다. 내부피폭인 경우 한 분자라도 제대로 걸리면 암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한 분자라도 빠짐 없이 찾아낼 측정기란 없다. (그것이 여럿 모이면 잡히지만 지극히 비싸고 무겁다.)

수입검사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해서 100%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산은 모두 금지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지금 적극적으로 '매우 위험하다'라고 말하는 이 (이제부터 A라고 둔다)의 생각일 것이다.

한국의 넷은 그 인식이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상식의 이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지만 접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미디어의 한계. 돈이 안되거든. 투박하지만 글의 전개를 위해, 이제부터 그런 사람들, '어느 정도 위험은 있다'라 말하는 이를 B라고 두자.


3. 같은 점과 다른 점

광우병이든 세슘이든 몇 겹 파고 들어가면 인류가 아직 규명하지 못한 영역이 나온다. 자칫 재수 없으면 치명적이어서 분자 단위 사고에 빠지기 쉽다는 공통점이 있다. 검출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한 분자라도 관리해야 한다는 노선을 추구하면 일상 생활이 될 수 없다. 어느 정도인지 따져 보고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유형이다.


다른 점은, 미량이지만 한국 땅과 식품에 세슘이 있다 (링크: 세슘 고농도 공방 - 자극적이다, 새겨 보시라)는 것을 대부분 모르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광우병은 검출 수치가 없지만 세슘은 (알고 보니) 수치가 공개되어 있다.


그 사실을 모른 상태였으리라. 우리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문제인지라 이 차이가

'마을로 들어오는 한센병 의심 각설이에게 돌 던지는 아이들'을 만들었다.


너 때문에 우리 죽게 생겼어,

제발 다른 동네로 좀 가.

차라리 죽어버려.


다수가 한 대상을 타자화하여 폭력을 가한, 나만 그런 게 아냐 자기 위안하며 넘어간, 이 유년의 즐겁지 않은 기억은 평생 따라 다닌다.


아이들은 뭘 모르니 그러려니 치자. 함께 던지거나 행여 애들 옮을세라 걱정어린 눈으로 보는 어른들은 뭔가. 정 많고 사람 좋은 이들이, 비탄에 빠진 이웃에게 "천벌 받은 거야" 수준의 저주를 퍼부은 것은 뭣 때문일까.


때로 번민하고 피난처를 찾으며 고단해 해야 하는 그 인식을 나는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어쩔 것인가, 그게 인간인데. 나 또한 잘 한 것은 없지 않은가? (아래 쓴다. 다음 글 이후라도 쓸 수 밖에 없지 싶다.)


4. 다른 처지의 다른 시각

A는 말한다, 이미 끝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위험이지만 일본 애들은 별 방법이 없어 외면 또는 부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럼 B는?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조심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한다.


그럼 나는? 일본 동경, 그 각설이와 같은 마을에 산다. A나 B와는 처지가 사뭇 다른 지라, 혹시 한센병(나병-이렇게 부르지 말자고 한다)이 아닌 건 아닐까? 적극적으로 살펴 볼 수 밖에 없었나 보다. 그 결과 아이들에게


그거 부스럼이야.

큰 걱정할 것 없어.

그리고 그 부스럼 네게도 있어.


(한국 땅, 쌀, 배추, 우유에 세슘은 있다. 체르노빌 탓에 지구 전체에 미량 존재. 큰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나의 아이들은 이 마을에 계속 살아야 하는 처지이거든. 나는 나의 아이가 A의 마을에 놀러갔을 때 돌 맞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그 수준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나중 정리.)


하지만 확실히 안전하다 말할 수 없는 찜찜함은 있어 더 살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삶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이니까.


5. 아이와 나

아이는 침묵하고 그늘로 숨는다.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가 흉칙하게 생기래?'며 자기 위안한다.

그건 인식이라는 물건이 사람을 보호하는 심리 기제라고 한다. 죄의식에 시달리면 생활이 되지 않으니까.


이 이야기는 여기가 고비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면, 후쿠시마를 둘러싼 근심과 걱정이 계속 되고 있으며 나를 비롯한 누구도 장담 못하도록 불신이 선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안심한다. 내 잘못은 없다, 원래 흉칙하게 생긴 걔 탓인 거다. 시작에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하지만 본질적 차이가 생기는 건 아니다. 실제 무척 위험하잖은가...


차라리 '신토불이 세슘' 식의 괴물, 피난처라면 흑선수도 과장이 심하군,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한 톨이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맞잖아'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한 인식은 바뀌기 어렵다.

인류가 모르는 영역이므로 증명 토론 불가이다. 그 동안 인식은 자가 발전하며 계속 벽을 공고히 하겠지.


여기에 도달한 내가 아이에게 말한다.


깨달은 너는 예전의 너 보다 낫다. 그 이에게 사과하는 건 어떠니?

일단 아직 돌 던지고 있는 다른 아이들의 시작을 힘 닿는대로 도와라.

지금 이걸 해두지 않으면 평생 시달리게 된단다. 네 몫이야.


외면했다면 또 모르겠다. 넘어진 이를 적극적으로 밟아대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A의 행위로 일본 극우의 힘이 보다 세졌을까, 약해졌을까?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정면으로 보고 성찰하라는 건데, 힘들겠지. 나도 힘겹다. 


앞뒤 가리지 않고 돌팔매질한 것은 평소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일본 정부와 백성을 나누어 생각하기 (북한 정권과 굶주린 동포를 대비해 보라),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즐거움 따위가 들어 있어 섬세하게 다뤄야 할텐데 공돌이로선 무리. 인문학도의 작업을 기대한다.


그래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초기 인식을 선점하고 넷을 지배한 선동 구조,  왜 아이들이 힘껏 돌팔매질을 하게 되었을까를 따지고 예전 문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난 시간을 들여 그 구조 분석을 어느 정도 마쳤다. 


어느 정도 초기 공포에서 벗어난 아이에게, 나는 묻고 싶다. 이제 풀어 봐라, 다시 이런 문제 만났을 때 넘어가지 않을 자신 있니? (아래 방사능 논리학 - 내부피폭 3제. 이런 문제는 자신이 답을 찾아야 하는 유형이다. 힌트나 해설은 존재 자체가 문제를 풀고자 하는 이의 사유를 방해한다.)


꽤나 까다로운 유형이지만 의심의 눈으로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구조가 허술하다. 정면으로 마주해 보시라. 그 정도 부실한 로직임에도 다수가 믿고 따른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따진 이라면 "일본의 시민사회와 한국의 시민사회는 절박함의 깊이가 다르다"는 명제에 닿게 된다. 절박함이란?


(너무 길어져 둘로 나눈다. 다음 글에 한일 시민사회, 휴머니즘과 광기,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전문가 집단의 토론을 한일 양국이 각각 어떤 깊이로 했고 그걸 시민사회가 어떤 깊이로 참조했는지 내가 가늠한 바를 이어나갈 생각이다. 물론 본 프로그램은...) (2013-11-29)